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 [대본]

작년인가 봤던 연극 연출등이 강해서 쉽게 잊을수가 없어서 찾아봤는데

이렇게 대본이 있군 ㅋㅋ

종로 세실극장

대본 출처 :
http://cafe216.daum.net/_c21_/cafe_nsread?grpid=18anz&mgrpid=&fldid=9Lkj&contentval=0000Ozzzzzzzzzzzzzzzzzzzzzzzzz&datanum=24&page=1&query=목탁속&item=subject&jobcode=1&dataidlist=24,64,&fldidlist=9Lkj,9Lkj,&cpage=0&totcnt=2&sorttype=&from=to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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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도법(道法)스님

탄성(彈誠)스님

방장(方丈)스님

원주(院主)스님

월명(月明)스님

망령(亡靈)

여인(女人)

※때 : 현대(現代), 곳 : 산사(山寺)

▶무대: 무대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객석에서 보아 좌측은 주로 도법스님 의 작업실인 서전(西殿)이고 우측은 대중(大衆)스님의 처소(處所) 등으 로 다양하게 쓰인다. 그러나 회전무대가 아닐 경우 무대의 좌우측이 다 른 느낌을 주어서는 아니되며 구분되어지는 것도 없다. 좌측 뒷편에 밖 으로 통하는 문이 있고 그 옆에 아직 완성되지 않은 불상(佛像)이 녹노 (물레) 위에 있다. 그 앞 탁자에는 찰흙, 헤라「彫刻칼」, 망치, 붓, 석고 등 조소(塑造)에 필요한 도구가 너절하다. 우측 옆으로 찻잔을 넣을 수 있는 찬장과 코너에 기역자 병풍(屛風)이 있다. 중앙에 낡은 탁자와 의 자가 세 개 있고 우측 전면의 앉은뱅이 책상이 객석과 마주 보고 있다. 칙칙한 분위기다.


<1장>

(도법스님과 탄성스님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의자에 앉아 있다. 늙은 모습. 사자(死者)의 모습인 도법스님. 흰 탈을 쓴 얼굴. 눈두덩이엔 피가 흥건하 다. 탁자에는 조각에 필요한 소도구가 가지런히 있고 두 개의 찻잔이 놓여 있다. 가끔 차를 마실 뿐 움직임이 없다. 탄성, 조각칼(헤라)을 만지작거리 면서 이따금씩 도법을 힐끔 쳐다 본다. 잠시 침묵이 계속된다. 그들 뒤에는 일그러진 불상이 있다)

탄성 : (쉰 목소리로) 왔나? 어떤가?

도법 : 그냥 그래.

탄성 : 나이가 드니까 참선(參禪)하다가도 졸고 횡보(橫步)하다가도 졸고 그래.

도법 : 기력이 쇠잔해서 일께야.

탄성 : 그럴 짬도 없는데 그러니까 문제지. 늙으면 그저 죽어야 되나부이. 나도 자네 곁으로나 갈까?

도법 : 아직 일러.

탄성 : 후후후, 도통(道通)하지 못했으니 더 정진(精進)하라는 얘기같군. 아암, 그래야지. 그렇고 말고. 돌대가리니 속세(俗世)에 더 머무를 수 밖에. (사 이) 항상 자넨 나보다 앞서갔지. 해인사(海印寺) 선방(禪房)에서도 그랬고 오대산(五臺山) 토굴(土窟)에서도 그랬고 이 봉국사(奉國寺)에서도 마찬가 지였어. 자네가 춘향(春香)이었다면 난 춘향이 시봉(侍奉)하는 년이었다고 나 할까? 자네 생시(生時)엔 이 몸이 시샘도 많았다고. 족히 이십년은 늦 은 늦깎기 후배가 경(經)공부나 참선에서 자꾸 앞서가니 괴롭지 않았겠나?

도법 : 허허, 처음 듣는 얘기군.

탄성 : 내 자신 내가 보기에 비참했다 이 말일세. 생사(生死)를 마빡에 써붙이고 참선하는 중이 그런 하찮은 것에 신경이 끊이질 않았으니 내 자신 얼마나 미웠겠나.

도법 : 난 늘 자네가 앞서간다고 생각했었네.

탄성 : 하하하, 자네가 미술대학 선생 자릴 내던지고 서른 몇살인가에 갓 입산 (入山)했을 때도 난 자넬 업수이 여기질 못했어. 자넨 다른 행자(行者)들 과는 달리 범상치 않았거든. 거목처럼 잔바람에 휩쓸리지 않았다고. 그때 내가 이 봉국사에서 교무를 맡았을 때인데 교무스님과 행자 사이라면 천양 지차(天壤之差)가 있을 터인데도 난 자넬 쉬이 보질 못했지. 그 만큼 자네 가 커버린 채로 들어왔다고나 할까. 하하하. 지금 생각하면 다투고 얼러대 며 긴 세월 함께 했었네. (주전자 있는 데로 가서 물을 따라 한 모금 마신 다. 창밖에 눈을 두다가) 어두워졌군. (의자에 도로 앉으며) 이런 어둠이 찾아올 때면 번뇌망상(煩惱妄想)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예컨데 진리(眞 理)란 무엇일까? 진리란 진리라고만 불리어질 뿐 애초부터 없었던 것은 아 닐까? 또, 있다면 그 반대의 것도 진리가 아닐까? 하하하. 어렸을 때 생각 들이 다 늙은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무슨 조화(造化)인지.

도법 : 오늘 따라 말이 많군.

탄성 : 그렇지? 오늘은 특별한 날이거든....... 나도 자네처럼 이런 저런 상념(想念) 들을 저 어둠에게 맡겨 두고 어디론가 가게 되겠지. 이젠 별 것 아닌 선행 (善行)으로 죽음의 위안을 삼던 나이도 지났어. 명예나 금전에 빠져 죽음 자체를 잊어본 적도 없는 반쪽 수행자이기도 하고. 그저 먹물옷을 입다 보 니 폭행이나 강도, 강간같은 큰 죄만은 면할 수 있었다는 자족(自足)이 있 을 뿐일세.

도법 : 아니야. 인간은 본래가 완성자(完成者)일세. 완성자임을 모르는데서 무지 (無知)가 싹트지.

탄성 : (손으로 허공(虛空)을 가리키며) 저것이 태양이다 했을 때 무엇이 있던 가? 태양은 없고 가리킨 내 손만 허공에 있지 않은가? 내가 그 꼴일세.

도법 : 자네가 허공을 잡았다고 했을 때 허공이란 다만 이름만 있을 뿐 모양이 없으니 잡을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것, 이와 같이 자네의 마음 밖에서 그 무엇을 찾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탄성 : 어둠속에서는 나무는 있어도 그림자는 없다 이 말인가?

도법 : 스스로 말함이 없어야 저절로 입에서 연(蓮)꽃이 필 것일세.

탄성 : 그러니까 자넨 나무요, 난 그림자다?

도법 : (엷은 미소)

탄성 : 으시대지 말어. (만지작거리던 헤라로 두 눈을 찌르는 시늉을 하며 빈정 대듯) 이랬었나? 다시 한 번 해보지 그래. 자넨 숱한 의문을 남긴 채 희한 한 부처를 하나 만들어 놓고는, 두 눈을 찌르고 서전교(西殿橋) 교각(橋 脚)에서 골짜기로 몸을 던져 죽고 말았어. 그게 도대체 지금 나한테 무슨 상관이냐고 묻고 싶겠지....... 바위틈에 끼어 있던 자네의 시신(屍身)을 들어 내며, 그리고 피로 물들었던 자네의 작업실 이 서전을 치우면서, 내 인생을 정리하듯 언젠가는 자네의 죽음도 정리되어야 한다고 마음 먹었지.

도법 : 탄성당. 무상참회(無常懺悔)일세. 난 당시 지나간 허물은 뉘우칠 줄 알면 서도 앞으로 있을 허물은 조심할 줄 몰랐어.

탄성 : 그 참회하는 마음으로 두 눈을 후벼 파고 용감하게 자폭(自爆)했다는 얘 기 같군.

도법 : (미소만 지을 뿐)

탄성 : 어떤 똘중들은 이런 말을 하대. 파계(破戒)는 개안(開眼)이라고. (힘을 주 며) 팔정도(八正道) 중 으뜸은 아직도 정견(正見)이라! 바르게 보아야지. 부처의 면상이 보잘 것 없다고 해서 눈알을 찌르고 구도(求道)를 쫑낸다는 것은 어쩐지 청정비구(淸淨比丘)로서 떳떳치 못한 행동같지 않던가?

도법 : 그렇게 묻는 자네의 마음이 바로 내 마음일세.

탄성 : 그렇다면 자네 세상은 아직도 암흑(暗黑)인가?

도법 : 때론 광명(光明)도 있지.

탄성 : 그래, 그것을 보아야지.

도법 : 볼 필요가 없어.

탄성 : 왜?

도법 : 자네 마음속에도 있으니까.

탄성 : 후후후. 나이가 듬에 인생살이가 허망터니 요즈음 들은 얘기 중 가장 그 럴듯 하군.

도법 : 가장 흔한 얘기겠지.

탄성 : 그래 맞아, 흔한 얘기지. 그 흔하고 흔해빠진 얘기속에 뭔가 답이 있을텐 데 까먹고 잊어먹고, 잊어먹고 까먹고 늘 그 모양일세. 이건 우문(愚問)이 네마는...... 왜 죽었나?

도법 :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보이며) 옛부처 나기 전에 의젓한 둥그러 미, 석가「釋迦牟尼」도 알지 못한다 했는데 어찌 그 제자인 가섭(迦葉)이 전할손가.

탄성 : (무릎을 치며) 옳고, 옳고!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 어리석은 질문이었어. 나도 이젠 이런 짓거리에 신물이 나. 말도 안되는 것을 말로 묻고 말로 대 답하고......, 하지만 궁금했거든? 자네 평생 화두(話頭)만 해도 그래. ‘어떤 사람이 잠자고 일어나 거울을 들여다보니 얼굴이 없어졌다. 왜 없어진 것 일까? 얼굴이 어디로 간 것일까?’ 그때마다 난 이렇게 결론을 내렸지. 거울 을 뒤집어 뒷면으로 본 거라고. 단순한 생각이었어, 난 항상 단순한 걸 좋 아했으니까. 그러나 화두란 듣고 배우고 끝없이 의심하는 거라고 하던가? 의심에 의심이 끊이질 않더군.

도법 :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완성자라네.

탄성 : 그럼 자네는 완성자로 죽은 건가?

도법 : 아닐세.

탄성 : 그럼 역시 사기꾼으로 죽은 게구먼.

도법 : 그럴지도 모르지.

탄성 : 그래, 그게 무방할 꺼야. 난 자네의 기이한 죽음을, 완벽한 불상을 만들 수 없다는 한계성으로 마감했었지. 그게 가장 쉽고도 고상한 결론이었으니 까. 그런데 해가 바뀔수록 엉망진창이 돼버렸어. 이봐, 도법당.

도법 : ?

탄성 : (일어나 엉거주춤한 자세로 한손으로 허공을 가리키는 자세를 취하며) 어 디서 이런 엉터리 발상을 하게 됐나?

도법 : 후후후.

탄성 : 내가 말한 쉬운 부처였나, 아니면 자네가 말하던 망령이었나?

도법 : 내 불안의 그림자였지.

탄성 : 하면 그 불안의 그림자가 바로 망령으로 나타났다?

도법 : 그렇지.

탄성 : 하면 그 망령이란 자네의 고통만을 긁어모은 분신(分身)일 수도 있고?

도법 : (고개를 끄덕인다)

탄성 : 그랬었군. 난 자네가 만든 그 희한한 불상을 내 방에 모셔 놓고는 긴 세 월동안 요리조리 궁리해 보는 게야, 이 돌대가리로 말일세. 자네의 불상은 고통 그 자체를 표현하고 있어, 온몸 구석구석에서 고통의 피가 솟구치고 있지, 너무나도 참혹해서 보는 이를 당혹케 해. 그러다가 이윽고는 그 고통 에 동참케 하거든. 내가 너무 고상하게 떠받들었나?

도법 : 글쎄.

탄성 : 평론가가 다 됐지?

도법 : 그래.

탄성 : 동료스님이나 신도들에게 그걸 보여주면 대혼란이 일어나, 기이하고 착잡 하고...... (구토 시늉) 올라오지. 너무나도 잔인해서 예불용으로는 부접합하 다는 거야. 하지만 난 믿고 있어. 자네 작품은 다른 건 모르겠지만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 만큼은 특별한 자비 능력을 갖고 있어. 자기 혐오나 자가당 착을 씻어주지. 불안감이나 작은 욕심 따위를 물러가게 하고 애잔한 궁휼 심을 불러 일으켜.

도법 : 과찬일세.

탄성 : 기이한 일이야. 어떻게 해서 그런 작업이 하룻밤 새에 일어나게 됐는지. 그리고 왜 두눈을 찌르고 죽어버렸는지.

도법 : 난 꿈을 꿨어. 고달펐던 이 생(生)에서 마지막 악몽(惡夢)을 꾼거야.

탄성 : 꿈속의 일들이 모두 현실로 나타났으니 그게 문제지.

도법 : 악몽이 너무 커서 현실을 눌러 버렸다고 생각하게나.

탄성 : 어찌됐든 그 악몽을 따라 쭈욱 올라가면 그때의 일을 밝혀 낼 수 있겠 군.

도법 : 그럴지도 모르지.

탄성 : 난 지금 망설이고 있어. 내가 죽기 전에 그 망칙한 불상을 어떻게 할까 하고 말야. 내 방에 모셔 놓고 혼자 보기엔 너무 아깝고 큰 법당(法堂) 부 처님으로 모시기엔 경망되고 잔혹스러우니...... 어떻게 하면 좋겠나?

도법 : 자네도 악몽에 시달리나 보군.

탄성 : 대답해 보게.

도법 : 휙하고 한 선(線)을 그어 버려.

탄성 : 어떻게?

도법 : .......

탄성 : 내 임의대로?

도법 : 물론이지.

탄성 : 또 나에게 미루는구먼.

도법 : 자네의 의지(意志處)는 항시 자네 자신 뿐이니까.

탄성 : 큰스님 말씀마따나 모든 것이 목탁구멍속의 작은 어둠이라?

도법 : 그래, 그래.

탄성 : 이봐, 도법.

도법 : 응?

탄성 : 이 서전(西殿)을 정리하려고 해. 어찌됐든 더 늙기 전에 뭔가 답을 구해 야 할 테니까.

도법 : (서서히 일어나 퇴장한다. 구름처럼)

탄성 : 마침 새로 온 교무스님이 조용히 경(經) 공부할 처소를 달라기에 이 곳을 말했지. 도배를 다시 하고 청소를 깨끗이 하면 자네의 체취도 자연 없어질 꺼야. 이제야 실토하네만 이 서전을 지금껏 이대로 놔둔 것도 순전히 이 땡초의 욕심이었다고. 아마 지대방에서 대중스님들의 험구가 대단했을꺼 야. 도법스님의 혼령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이야. 사실 여기사 공부하기엔 금상첨화지. 눈 앞 계곡엔 모악수(母岳水)가 흐르고 서전 교각과 주위의 은행나무 겹진달래는 아름답다 못해 무릉도원 같질 않던가. 헌데 아쉬운 점도 있어. 난 이따금 무료해질 때면 자네 영혼을 여기에 불러내서 혼자 횡설수설하는 것이 일과처럼 됐었는데....... 아무튼, 이젠 자네의 죽음을 내 머리에서 말끔히 씻어내야 할 때가 왔어. 어떻게 정리해야 되지? 자네의 인생과 죽음과 악몽을.......

-암전-


<2장>

(차를 끓이고 있는 월명스님, 어린모습. 도법스님은 우측책상 옆 의자에 앉 아있다. 40대 후반의 모습)

월명 :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전해드렸으니까 곧 오실거구만요.

도법 : .......

월명 : 맨날 어딜 쏘다니는지 모르겠어요. 허구헌날 방장스님이 주지스님을 찾아 오라는데 낸들 어디 계신지 알아야지요. 이리저리 찾다가 아차 싶어 배추 밭에 가보면 아, 글쎄 거기서 한가롭게 잡초를 뜯고 있다니까요. ‘스님, 스님, 방장스님이 아까부터 찾으세요!’하면, ‘알았다, 이놈아!’하고 한 시간 ...... 반나절...... 한 나절......, 애꿎은 나만 발만 동동 가슴만 콩알콩알. 우리 주 지스님은 굼벵이라구요.

도법 : .......

월명 : (눈치를 살피다가) 스님이 도법 큰스님이시죠?

도법 : 큰스님?

월명 : 스님 얘기 다 들었어요. 3년간 토굴에서 참선하셨고 또 3년간 묵언도 하 시고, 또 굉장한 화가이시고...... 우리 절 불상을 만들려고 오셨죠? 그죠......? 헤헤헤, 다 알아요. 내가 이래뵈도 이 봉국사 정보통이라구요.

도법 : 아까도 배추밭에 계시던가요?

월명 : 누가요? 아, 주지스님요? 에, 거기서 맨날 산다구요. 하루종일 배추하고 연애하는지, 잡초하고 춤을 추는지 알 수가 없다니까요.

(그때 탄성스님이 호미를 들고 등장한다)

탄성 : (도법을 힐끗 보고나서 월명에게) 돌멩아!

월명 : 제 법명은 월명이예요.

탄성 : 월명이면 어떻고 돌멩이면 어떠냐. 돌대가리긴 마찬가진 걸.

월명 : 흥, 스님도 탄성이 아니고 탄광이랍디다.

탄성 : 허허, 또 저느무 잔솔배기....... (도법에게) 아까 자네가 일주문쪽으로 올라 오는 걸 보았어. 만나면 첫마디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한참동안 망설였지, 배추밭에서. 해서 늦었구먼. 결례였나?

도법 : 결례는 무슨?

(차를 끓이고 있는 탄성스님. 도법스님은 우측 책상 옆 의자에 앉아 있다. 40대 후반의 모습)

탄성 : 무슨 차로 할까?

도법 : 결명자로 하지.

탄성 : (의아한 표정으로) 결명자?

도법 : 설탕을 듬뿍 타서.

탄성 : 허허, 이 사람 왜 이러나, 걸신들린 사람처럼. 설탕을 듬뿍 타다니.

도법 : 그렇게 됐네.

탄성 : 어디서 곯은 게구먼.

도법 : (사방을 둘러 보며) 쭈욱 여기에 있었나?

탄성 : 응.

도법 : 난 자네가 선방으로 떠난 줄 알았어.

탄성 : (도법의 건너편에 앉으며) 이게 몇 년만인가. 육, 칠년도 넘었지?

도법 : 벌써 그렇게 됐나?

탄성 : 자네가 큰 법당 주불(主佛)제작을 맡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지. 재주있 다는 소린 들었지만 이렇게 현실로 나타날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방장스 님의 주문인가?

도법 : 응, 송구하이.

탄성 : 송구할 꺼야 무어 있겠나, 방장스님이 잠시 물컹한 걸 밟은 거겠지. 얼마 나 걸리겠나?

도법 : 삼년 쯤?

탄성 : 삼년씩이나? 옛날 설화에서나 듣던 얘기군.

도법 : 맞았어.

탄성 : 이젠 조각가로 직업을 바꾸지 그래?

도법 : 마지막 작업으로 삼고 싶어.

탄성 : 나가세, 산보도 할겸. (저쪽에다 대고 큰소리로) 월명아, 찻물이 끓으면 니놈 혼자 다 처먹거라!

(둘이 걷는다)

탄성 : 우리가 마지막 본 게 오대산 토굴이었을걸?

도법 : 응.

탄성 : 빈 거울에 빈 얼굴이 준 화두가 결국 불상 제작이었나?

도법 : 글쎄......, (몇 발자국 걷는다) 자넨 변한 게 없어 보이네마는.

탄성 : 왜 나도 많이 변했지. 이 봉국사가 날 가만히 놔두지 않아. 방장스님이사 내 것 남의 것 조차 구별 못하는 위인이니 내가 젯상 대가리가 될 수 밖 에. (눈을 지그시 감아 돼지 흉내를 낸다)

도법 : 아까 그 사미승한테 탄성스님 계시냐니까. ‘주지스님이요?’하데. 깜짝 놀랐 지, 자네가 주지라니 말이야. 봉국사가 자네의 오감(五感)을 덮어 버린건 아닌가?

탄성 : 난 여길 사랑하지. (쪼그려 앉으며) 우선 소란스러운 게 살 맛이 나. 그동 안 절이란 곳이 너무 고요해서 생명력이 없었어. 일찌기 원효스님도 복작 복작한 시장바닥에서 불성을 체득했거든. 저 별들 좀 봐. 저걸 보고 있노라 면 난 아주 낮고 작아서 미물처럼 느껴지지. 개미가 날 보면 또 그렇게 느 낄지 몰라. 거대한 것을 보면 숙연해지게 마련이니까. 인생은 그런 건데, 그렇게 낮고 작아서 숙연해지는 것인데, 왜들 그리 요란하고 굉장하게 떠 드는지 모르겠어. 끝없이 한없이 넝쿨처럼 뻗어가는 욕망의 안타까운 모습 들이 눈물겨워 아예 웃고 말지. 욕망도 그렇고 출세도 그렇고 모든 게 생 각의 갇힘속에서 발버둥치는 한 조각 뜬구름이거늘. (일어서며) 안 그런 가?

도법 : 글쎄.

탄성 : 또, 그 글쎄군.

도법 : 많이 도와주게. 그리고.......

탄성 : 그리고?

도법 : 제발이지 내 이번 작업을 속가(俗家)의 연속으로 보진 말아주게. 미대 선 생따위와 연관짓지 말아달라는 얘길세.

탄성 : 노력해 봄세. 하지만.......

도법 : 서전을 비워줄 수 있겠나?

탄성 : 그래, 그렇게 하지.

-암전-


<3장>

(의자를 딛고 서서 불상 구조물의 얼굴 부분에 헤라를 들고 세각(細刻)하 는 도법스님. 뜻대로 되지 않는듯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가 다시 불상을 보면서 헤라를 치켜들지만 묘안(妙案)이 없다. 이러기를 여러 차례. 힘없이 의자에서 내려온다. 그때 문을 통해 조심 조심 등장하는 원주 스님. 여성적인 모습과 걸음걸이이다. 손에 든 보자기를 탁자에 놓은 다음 다시 조심 조심 나가려 한다. 그때 도법스님이 인기척 소리를 듣고 뒤돌아 본다)

원주 : (여성적 말투로) 아유, 이 오도방정! 눈에 띄면 방해될까봐 몰래 가려 했 는데, 죄송해요. 누룽지 좀 싸 왔어요.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그렇지 개구리 점프하듯 끼니를 건너 뛰면 어떡해요. 그럴수록이 몸조릴 잘 하셔야지요.

도법 : 점심공양「午供」이 체했나 봐요.

원주 : 아, 그럼 저한테 말씀하셔야지요. 원주라는 게 뭐하는 소임입니까? 스님같 이 편찮은 분이 있는가, 대중스님들의 영양상태는 어떤가, 콩나물 두부 참 기름은 얼마나 있는가, 뭐 이런 것을 두루두루 살피는 게 원주 아녜요? 뭘 드릴까요? 까스명수? 활명수? 건위정? 원기소......? 말씀만 하세요. 제가 즉 각.......

도법 : (빙긋이 웃으면서 원주에게 다가간다. 원주의 빠른 말투와 몸짓이 재미 있기 때문이다)

원주 : (입을 막으며) 아유, 이 오도방정! 항상 입조심, 몸조심 한다는 게 또 이 러니....... (계면쩍은듯) 도법스님, 죄송해요. 전생엔 지가 비구니였나봐요. (불상 구조물을 보며) 아유~ 이쁘기도 해라. (자기의 불쑥 튀어나온 말에 놀라) 히익-! 이 오도방정!! (입을 찰싹 때린다) 부처님께 이쁘다니. 호호 호호, 존안유망 하시네요. 이제 다 끝난 건가요?

도법 : 아직 멀었습니다. 존안이 완성되지 않은걸요.

원주 : 그래요? 저게 아직 안된 거예요? 난 또.......

도법 : 존안이 완성되면 여기다 석고를 입혀서 틀을 뺀 다음, 다시.......

원주 : (말을 막으며) 아유, 무지하게 복잡하네요. 하긴 부처님 만드는게 하룻밤 뚝딱같이 쉽겠어요? (머리를 긁적이며) 조금만 생각했어도 알 수 있을 머 린데. 그래도 초파일 봉안식까진 시간이 충분하겠지요?

도법 : 그래야지요.

원주 : 이번 초파일은 으리으리할 꺼에요. 명찰대덕 스님들을 모두 모셔다가 큰 잔치 벌릴테니. 대찰 큰법당 봉안식이니 허술하게 치룰 수도 없잖아요.

도법 : 망신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지요.

원주 : 아유, 도법스님 하시는 일이 어련할라구요.

도법 : 업보만 느는 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원주 : 아유, 도법스님이사 말이 필요하겠어요. 그대로가 무진법문인데....... 저 갈 래요. 도와드린다는 푼수가 항상 폐만 끼치니. (나가려고 돌아선다)

도법 : 바쁘지 않으면 좀 앉으세요.

원주 : (반가운 듯 잽싸게 의자에 앉으며) 헤헤헤. 저야 뭐, 바쁠 게 있나요. 씻 고 닦고 치우고, 매냥 그 일이 그 일이지요. 하긴 내일 대전보살들이 드리 닥칠 모양인데 준비해논 건 없고 막막하답니다. 김치도 담가야겠고....... 그 거야 겉절이지로 하면 되겠지만 또 찌게거리, 국거리...... 아유!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 해요. 게다가 채공행자가 갓 들어와서 일하는 걸 보면 애간장 태 운다고요. 기껏 한다는 게 다꾸왕 무침이니 어쩌겠어요. 지가 헐레벌떡 설 레벌떡 설쳐대는 수 밖에....... 스님, 이번에는 절대로 우리 된장 안 뺏길 거 에요. 이느무 대전보살들이 얼마나 깍쟁인지 제각각 비닐봉지 하나씩 가지 고 와서, ‘스님, 된장이 아주 맛있네요. (비비꼬며) 호호호호~’ 흥! 절은 뭐 지네들 된장 치닥거리하라고 생긴 건가. (입을 막으며) 아유, 이 오도방 정. 도법스님 앞에선 조심한다는.......

도법 : (빙긋이 웃는다)

원주 : 모든 스님이 도법스님만 같다면야 시방세계가 불국토일 거에요.

도법 : 하하하, 무슨 말씀을.

원주 : 전 밤마다 스님 생각을 한답니다. 난 언제나 저런 스님이 될꼬. 말 없고 조용하고 그 가운데 움직이시고.......

도법 : 겉모양 뿐이지요.

원주 : 저렇게 겸손하시지. 같은 선방수좌라도 우리 주지스님은 멀었어요. 제 나 이 서른 셋인데 그걸 모르겠어요? 지가 선방수좌입네 하고 시시때때 가리지 않고 욕하는 걸 보면 그게 중인지 욕발이 아나운선지 분간할 수 없대두요.

(그때 탄성스님이 등장한다. 헝겊가방을 어깨에 맨 것이 어디 나갈 차림이 다. 도법과 원주는 탄성의 등장을 아직 모른다)

도법 : 왜요? 탄성당이야 진국이지요.

원주 : 아유~ 말도 마세요! 주지스님이 진국이면 진국들은 맨날, 개자식 미친 놈 꼴깝떨고 옘병하네 소리가 끊이질 않으라고요.

탄성 : (큰 소리로) 개자식 미친 놈 꼴갑떨고 옘병하네!!

원주 : (그제서야) 으악! (도망친다. 잠시 후 문을 빠끔히 열고) 주지스님, 죄송 해요. 호호호호.......

탄성 : 호호호호...... 맨날 죄송 죄송. 언제나 칭송 칭송 할꼬.

원주 : 흥!

탄성 : 또 저쪽에 앉아, ‘스님, 전 밤마다 스님 생각을 한답니다.’ 이랬었누?

원주 : 흥! 쳇! 핏! (문을 꽝하고 닫는다)

탄성 : (탁자에 헝겊가방을 내려 놓으며) 불상은 잘 돼가나?

도법 : 그럭저럭.

탄성 : 오늘 예불 마치고 나오다가 내가 방장스님께 이랬지. ‘스님, 되벱「道法」이 는 예불에 맨날 빠지니 곤장이라도 몇 대 갈겨야 되지 않겠습니까? 스님 말씀마따나 예불 안들어 오는 놈이 어디 중이랍니까?’ 이랬더니 그 골수중 한다는 소리가 ‘그 자체가 원력(願力)이요 기도인데 예불은 무슨 예불인고’ 후후후......, 그 자체가 뭔지 아나? ...... 방장스님도 돌았지. 어째서 자네같은 땡초에게 이런 대불사(大佛事)를 맡겼는지....... (구조불을 유심히 본다) 되 어가는 대로 되어지는게 아름다움이라고 했던가? 아름답군, 훌륭해. 그렇다 고 명작이라는 뜻은 아니야. 자네 솜씨치곤 괜찮다 이거지.

도법 : 어쩐 일인가?

탄성 : 죽었나 해서 들러 봤지.

도법 : 들러 보이?

탄성 : 쉽게 죽을 것 같진 않구만. 언제쯤이면 끝나겠는가?

도법 : 글쎄.

탄성 : 삼년 가지고도 부족했던가?

도법 : 짧은 시간일 수도 있지.

탄성 : 자넬 보고 있노라면 석가탑을 만들었다는 어느 석공 얘기가 떠올라.

도법 : 그래?

탄성 : 좋은 뜻으로 얘기한 게 아냐. 그만큼 어리석다 이 말일세. 소탐대실, 사실 난 자네가 마음에 들지 않아. 되먹지 않은 것에 집착하려 들고 그로 인해 심신이 병들어 가고 있어. 한 마디로 꼴불견일세. 속세에서 못 이룬 꿈을 꼭 이런 식으로 풀어가야 하나? 불제자의 수도는 그래선 안돼, 속세와의 단절속에서 깨우쳐야만 되는 거라고. 마치 수도승들이 옛그림을 찢어버리 고 말간 백지위에 새 그림을 그려가고 있다면 자넨 속세에서 그리다만 그 림을 그대로 가져와 그 위에 덧칠하고 있다고나 할까?

도법 : 자네 마음에 꼭 드는 게 어디 있던가?

탄성 : 없는 것을 자네가 보여 주면 얼마나 좋겠어.

도법 : 그러니까 무지혜자 아닌가, 당해봐야 깨닫게 되는.

탄성 : (구조물을 보며 혼자말로) 화가와 수도승이라...... 자넨 어느 쪽인가?

도법 : 기대승과 율곡의 편이지.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일세.

탄성 : 두마리를 쫓다가 둘 다 놓치고 말껄?

도법 : 결국 난 한 마리를 쫓고 있는 셈이지.

탄성 : 그럴까?

도법 : 그럼.

탄성 : (의미있는 미소를 지어보인 다음) 쉬었다 해. 잘 안될 땐 푹 쉬는 게 최 고야. 환경을 바꿔 보던지. (도법을 살피며) 망중유한(忙中流閑)이란 말이 있지. 짬을 내어 북성암이라도 댕겨오지 그래. 거긴 아직도 입에 맞는 홍시 가 남아 있을 껄.

도법 : (의자를 권하며) 좀 앉게.

탄성 : 아니, 곧 가야돼.

도법 : 어딜?

탄성 : (앉으며) 한 많은 사람이 이 세상을 하직했지.

도법 : 시달림 가려고?

탄성 : 응.

도법 : 그렇게 시달림 갈 스님이 없던가?

탄성 : 이 밤중에 누가 썩 좋은 일이라고 나서겠나, 주지 밥상 잘 차려 먹었으니 그런데나 다녀야지.

도법 : .......

탄성 : 시체를 보면 달포쯤 정신도 차릴테고.

도법 : .......

탄성 : (침체된 분위기를 바꿔야할 필요성을 느낀 뒤 활달하게 일어서며) 난 본 디 불상에 대해 불만이 많은 사람이야. 법당에 있는 불상이라는 것이 한결 같이 원만상이거든. 여유있고 품위있고 자비롭고 부족함이 없지. 그건 석가 모니 본연의 모습이 아닐 꺼야. (구조물을 가리키며) 이것은.......

도법 : 말해 보게.

탄성 : 정신 차려.

도법 : 잘 봤네.

탄성 : 하나를 소유함은 더 큰 하나를 잃는 법이지.

도법 : 자네도 잘 보라고.

탄성 : 자꾸 비워내야 할텐데 자꾸 채워넣고 있어.

도법 : 그럴까?

탄성 : (가방을 메며) 가야겠네.

도법 : 혼자 가려고?

탄성 : 너무 늦으면 귀신이 심심해 하거든.

도법 : 장사집이 어딘데?

탄성 : 원포리 지물포 집.

도법 : 길조심 하게.

탄성 : 빙판길엔 이력 났어. (나가려고 한다)

도법 : 어이, 탄성당!

탄성 : (멈춘 채로)

도법 : 같이 가세.

-암전-

<4장>

(어둠속에서 금강경 외우는 독송소리. 용명(溶明)되면 우측 상수 병풍앞에 흰 천으로 덮여진 시신이 있다. 도법과 탄성이 그 앞에 앉아 금강경을 독 송하면서 시달림-사람이 죽었을 때 불교에서 하는 의식-을 하고 있다. 향 로에 가득찬 향불. 겨울 바람소리 세차다)

탄성 : 쉬었다 하세. (무릎을 두어번 두드린 다음 몸을 풀기 위해 일어나서 步禪 을 한다) 자네도 좀 걸어. 앞으로 너댓시간쯤 더 두드려줘야 될테니까.

도법 : 괜찮아.

탄성 : 바람소리가 으시시한 게 다시 추워지려나 보군.

도법 : 글쎄.

탄성 : 힘들지?

도법 : 오래간만에 하는 거라.......

탄성 : 그럴 꺼야, 난 오래 앉아있을 수가 없어. 복수(腹水)증세야. 전생에 많이 처먹은 업보지.

도법 : 장사집이 너무 조용하지 않나?

탄성 : 다들 곯아 떨어졌겠지.

도법 : 곡(哭) 소리도 안 나는군.

탄성 : 차라리 울지 않는 게 낫지....... 안색이 안 좋구먼?

도법 : 아닐세, 냄새가 좀 고약하군.

탄성 : 조금 있음 괜찮을 걸세. 길들기 나름이지. 한 번은 고속버스에 치인 사람 을 시달림하러 갔었는데 어찌나 냄새가 고약하던지....... 칠월 뙤약볕이었나 봐. 장삼에 가사까지 걸치고 도로변에서 목탁을 두드리는데 빡빡머리가 왜 그리 야속허겠나. 그런 데선 삿갓이라도 쓰고 하라면 좋겠대.

도법 : (마음에 없는 미소)

탄성 : 도법당.

도법 : (건성으로) 응?

탄성 : 김맹석.

도법 : 왜?

탄성 : 뭘 그리 생각하나?

도법 : 생각은 무슨.

탄성 : 내가 맞춰 볼까?

도법 : 뭘?

탄성 : 저 시체에 대해 생각했겠지. 왜 죽은 걸까? 죽어야 될 큰 이유라도 있는 가? 어떤 기막힌 사연일까? 이 시체에서 불상에 필요한 뭔가가 숨어 있진 않을까......? 난 안그래, 저 사람은 죽을 때가 돼서 죽은 거야. 그 뿐이야. 여 보게 도법당. 자네와 내가 뭐가 다른 줄 아나?

도법 : 갑자기 무슨 소린가?

탄성 : 모든 일을 자넨 어렵게 풀고 난 쉽게 풀어. 불상만 해도 그래. 자넨 불상 이라 하면 부처님의 미소나 자비로운 눈에 있다고 생각하지. 그래서 오직 눈과 미소만을 생각하지. 난 그렇지 않아. 눈속에 무슨 놈의 부처가 숨어있 겠나? 미소속에 무슨 놈의 부처의 법열이 살아 숨쉬고 있겠어. 예술가들은 그런 조그만 데서 어떤 신비를 찾는지 몰라도 그게 아냐. 부처는 몸 전체 에 있다고 생각해. 목도 갸우뚱하고 입도 찌그러진, 척 봐서 느낌이 오는, 쉬운 부처. 쉽게 생각하라고. 단순은 복잡 위에 있어.

도법 : 이 사람 어쩌다 죽었다던가?

탄성 : 드디어 관심이 발동됐군. 자살했어.

도법 : 자살?

탄성 : 그것도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질러서.

도법 : 소신공양(燒身供養)처럼?

탄성 : 응.

도법 : 무슨 일로?

탄성 : 뭐 그렇고 그런 이유겠지, 주간지 삼류기사처럼.

도법 : .......

탄성 : 관심 갖지 마.

도법 : .......

탄성 : 생각하지 말라구.

도법 : .......

탄성 : 시달림은 시달림으로 풀어야 돼.

도법 : .......

탄성 : 냄새 참 지독하군.

도법 : 안 되겠어. 향을 더 꽂아야지.

탄성 : 한 통 다 태웠어.

도법 : 더 없나?

탄성 : 응. 장작이라도 안 땠으면 좋겠구만.

도법 : 원래 시체있는 방엔 불을 안 때잖아?

탄성 : 우리가 추울까봐 때나부지.

도법 : 이상한 것 천지야.

탄성 : 생각하지 말래두.

도법 : 아니야.

탄성 : 뭐가?

도법 : 입산한 지 얼마 안돼 첫 시달림 갔을때 얘긴데,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 어 고생 고생하다가 죽은 사람이었어. 입관할 때 시신을 봤는데 반은 이미 썩었고 반은 괜찮아. 상상할 수 있겠나? 반은 괜찮고 나머지 반만 썩었다 이 말이야.......

탄성 : 허허, 이 사람 왜 이래? 잊어버려.

도법 : 그후 달포쯤 지났을 때야. 큰법당에서 금강경을 독송하고 있는데 누가 ‘앗 뜨거!’하면서 지나가...... 깜짝 놀라 쳐다보니 반쪽짜리 그 사람이야.

탄성 : (경고하듯) 도법당!

도법 : 현실이었을까, 환상이었을까?

탄성 : 자네, 이번에도 그걸 확인해보려고 따라 나섰나?

도법 : 관속에 누워있던 반쪽짜리를 본 뒤, 나는 가시적으로 죽어가고 있었어. 내 가 그 관속에 누워 있는 거야. 누워 있는 내 몸 위로 바람이 불고, 비가 내 리고, 낙엽이 지고, 구름이 흐르고, 나는 서서히 흙으로 식혀져 가는 것이 지. 살아있는 내가 죽어있는 나를 들여다 보고 있단 말이야. 전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뚜렷했고 몇 만리를 걸어도 그 경계에 도달하려면 아직도 아득하다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그 경계가 없어졌어. 단지 눈만 감으면 넘나드는 거야. 풀 수 없는 건 영혼이지. 영혼에 대한 의문만 이 내가 살아있다고 믿게 하는 유일한 부분이야.

(바람소리 쌩쌩. 탄성, 도법 옆에 와 앉는다)

탄성 : 금강경이나 두어수 더 때려주지.

도법 : 이번엔 내가 요령을 잡을까?

탄성 : 마음대로 해. 우리가 염불해 준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그게 다 지 업(業) 인데. 땡초가 땡초 제도하는 격이지. (목탁을 두드리다) 아무래도 안 되겠 어. (일어서면서) 아궁이에 찬물이라도 끼얹고 와야지. (밖으로 나간다.)

도법 : (요령을 흔들며 경을 외우려다가 탄성이 나간 쪽을 향해) 탄성당, 탄성당! 냉수 좀 떠 오게. (대답소리가 없자) 탄성당, 탄성당!

(이상한 듯 오른쪽으로 시선을 가져 오는데 흰 천으로 덮여진 시신, 상체 를 일으키고 있다)

도법 : 으악......!

-암전-


<5장>

(도법의 작업실. 도법은 중앙 의자에 앉아 있고, 탄성은 사진 한 장을 손에 쥔채 그 주위를 서성인다. 서로 감정을 자제하고 있다)

탄성 : 이게 무슨 망신인가? 자넬 업고 초상집에서 나오는데 낯이 얼마나 뜨거웠 는지 알어? 월명이 그 코흘리개를 데리고 다녀봐도 이런 일은 없었다고!

도법 : .......

탄성 : 그리고 제발이지...... (헤라를 집어 보이며) 이 짓거린 그만 둬. 자넨 할미 새야. 부러진 날개로 독수리까지 업을 수야 없잖은가?

도법 : 모래로 밥을 짓긴 마찬가질세.

탄성 : 자넨 불상 하난 만들지 몰라도 불도(佛道)는 망각해 버렸어.

도법 : 그만 해.

탄성 : 허허, 이 사람 왜 이리 고집이 심하지?

도법 : 또 억지를 부리니까 그래.

탄성 : 자네 주머니에 있던 이 마누라 사진은 무엇을 뜻하는 겐가?

도법 : 그게 어쨌다는 것이야?

탄성 : 이게 다 미(美)요, 색(色)이요 욕망의 탐잔치에서 오는 게 아니겠나?

도법 : 넘겨 집지 말어.

탄성 : 찔렸으면 아프다고 해.

도법 : 왜 자꾸 쓸데없는 걸 들먹거리는 거야! 내가 아닌 말로 암내 맡은 숫캐마 냥 날뛰기라도 했다는 소린가?

탄성 : 그렇다면 나이 오십 다 된 지금에 와서 불상을 만들겠다느니 탱화를 그리 겠다느니, 왜 엄한 짓거리 하고 댕겨?

도법 : 그게 이거 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래.

탄성 : (버럭 소릴 높여) 왜 상관이 없어! 절밥 먹고 있는 중이 자꾸 딴 짓거리 에 한눈 파니까 그렇지. (헤라를 치켜 들며) 이런 놀음하려면 절엔 뭐하러 왔어. 차라리 속가에 나가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지.

도법 : 불사(佛事)를 노름이라고 생각하나?

탄성 : 그럼 이게 신선놀음이 아니고 뭐야?

도법 : 뭘 모를 땐 가만히 있는 게야.

탄성 : 가만히 있게 됐어?

도법 : 가만히 안 있음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탄성 : 이 짓을 그만 두든지 속퇴를 하든지 무슨 구정을 내야지.

도법 : 누누히 말했쟎아. 속인(俗人)이 되는 도인이 되든, 깨우치든 망가지든 마 지막 원력(願力)으로 삼아 결판을 내고 싶다고

탄성 : 그 원력이 허깨비로 나타났던가?

도법 : 시체가 일어섰단 말이야. 불에 타 죽었다던 그 놈이 벌떡 일어섰다구!

탄성 : 바퀴가 상하면 구르지 못하고 노인이 되면 수행을 못 해. 쉬흔이면 적은 나이가 아냐.

도법 : 왜 사람 말을 안 믿어!

탄성 : (냉정을 되찾아 낮은 소리로) 그래, 자네 말마따나 시체가 다시 살아났다 고 치세. 그게 뭐가 무섭나? 아닌 말로 자넬 죽이려고 대들었다 한들 무어 그리 대수겠어?

도법 : 자네...... 연비를 어떻게 생각하나?

탄성 : 연비라니......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도법 : 살다보면 급류에 휘마리게 되고 짧은 시간 내에 큰 결론을 내리고 싶을 때가 있어. 그럴 때 택하는 것이 연비일 게야. 타오르는 촛불에 다섯손가락 을 밤새 태우면서 피범벅 땀범벅이 되어, 후회하며 쫑알대고, 발악하며 외 쳐대는 그러면서도 뭔가 정리하고, 결심하고, 참회하고, 용서받는, 그런 응 집된 시간.......

탄성 : 그 연비가 자네에겐 불상조각이었다?

도법 : 그래.

탄성 : 불상 만들려다 또 그 시체보려고?

도법 : 시체가 나타난다면 그것 조차도 불상에 집어 넣어야지.

탄성 : 당당하군. 그렇지만 지금도 불안에 떨고 있어.

도법 : 마지막 원력이라고 덮어두게나.

탄성 : 원력일 것도 없어. 자넨 지금, 언제 어디서 또다른 시체가 불쑥 나타날지 몰라 벌벌 떨면서 무슨 놈의 고상한 미사여군가.

도법 : 그만 두세.

탄성 : 왜, 듣기 싫은가?

도법 : 계속, 반복 반복 반복이야.

탄성 : (빈정대듯) 시체를 피해서 불상제작에 몰두해? 불상이나 시체나 다 똑같 은 집착이야, 그것도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도법 : .......

탄성 : (나직하게) 집착은 끝이 없어. 하나의 집착은 또 다른 집착을 불러 일으 키거든.

도법 : .......

탄성 : 자네 오대산 토굴에서 삼 년 결사날 때 생각나나? 그땐 이렇게 집착이 심 하지 않았어. 그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게. 미색(美色)이란 한낱 허깨비에 불과해. 선방에 가버려. 허리춤에 붙은 뱀 집어 던지듯이 휙 던져 버리라 고. (헝겊가방을 어깨에 맨다) 큰소리 쳐서 미안한네, 도법당.

(탄성, 퇴장한다. 멍한 시선의 도법,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나 거닌다. 그 때 화상을 입은 망령이 나타난다. 목만 하얗고 나머진 피투성이인 괴기의 모습. 망령, 도법의 뒤에 서서 도법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인다. 망령의 움 직임은 흉한 몰골과는 달리 천진난만한 원숭이를 연상케 한다. 이상한 예 감을 느낀 도법, 뒤를 돌아 본다. 순간 기겁하여 뒤로 넘어진다)

망령 : 허허, 이 사람 남의 삭신이라도 뜯어 먹어야지 안 되겠구만. 젊은 사람이 왜 이리 겁이 많어. 나라니까. 한 번 본 적이 있잖어. 이제야 알아보는 모 양이군. 그렇게 겁먹은 얼굴 하지 말어. 겉모양만 가지고 무서워하면 어떡 해.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고. 껍데기가 좀 끄슬려서 그렇지 알맹인 말 짱해. 자, 잘 봐. 괜찮지?

도법 : (외면한다)

망령 : 안 되겠군. (두어 발짝 물러나 가무(歌舞)한다)

살어리 살어리랐다 청산에 살어리랐다...... 어때, 이젠 마음이 놓이지? 도법 당, 우리 수인사나 하고 지내세. 난 김명석이야. 공교롭게도 자네하고 이름 이 똑같애. 흔히들 김맹석이라고도 부르지. 그게 부르기 편한가 봐. 자넨? 하하하하....... 아직도 경계 하는군. 하지만 다 알아. 자네 고향이 충남 보령 군 대천읍 국말리 나무장터. 1남 4녀 중 막내. 네 계집 끝에 고추였으니 자네 아버지 김팔만이가 얼마나 좋아했겠나. 맹석이, 안 그래? 자, 이제 일 어나. (도법을 의자에 앉힌다)

도법 : 도대체 당신은 뉘시요?

망령 : 나? 김명석. 김맹석이라고도 부른다니까. 아! 이제야 입을 떼었군. 글쎄, 그래야 된다니까...... (다가서며) 안 그래?

도법 : (뒷걸음질친다)

망령 : 그래...... (뒤로 물러나며) 이 정도 떨어져서 얘기하지 (주위를 훑어보며) 땡초 노릇 하느라 고생이 많구만. (코를 막으면서) 어휴~ 홀애비 냄새. 가 끔 향수라도 뿌리게나. (탁자에서 헤라를 집으면서) 날이 번뜩이는군. 조심 하게. 이걸로 눈이라도 찌르는 날엔 볼장 다 보겠어. 그런데, 뭘 조각하지?

(주위를 살피다가) 저거군. 저것이 문제의 그 불상이렸다. (구조물을 본다) 일리는 있어. 탄성당은 ‘이것은 개지랄이다!’ 자네는 ‘이것도 수행이다......!’ 여보게, 탄성당은 요만할 때부터 중노릇했기 때문에 자네같은 신식중하고 는 달라. 예술에 대해선 도무지 깜깜이라고. 나도 그래. 그래도 탄성이보다 는 조금 낫지. (유심히 본다) 근사하군. (그러다가 갑자기 뒤로 물러난다) 여보게, 저것 좀 없앨 수 없겠나? 안 되겠어. (망치를 든다)

도법 : (달려가 붙들며) 왜 그래요?

망령 : 헤헤헤.......

도법 : (망치를 뺏는다)

망령 : 그래. 자네가 만든 것이니 자네가 부수게. 자업자득(自業自得)이지. 난 저 부처 쌍판만 보면 울화통이 터져서 그래. 자네들이 쥐를 보면 징그럽듯이 난 저것만 보면 속이 뒤집혀 못견딘다니까....... 헤헤헤...... 미안해. 애써 만든 거 부술려고 해서...... 자네가 꼭 부숴야 하네, 우리 사이가 좋아지려면 말일 세. 가만 있어봐! 자네가 안 부수면 어떡하지? 아하, 그렇지. 내 정신이 이 렇다니까. 그땐 내가 부수면 되겠지. (불상에 침을 탁 뱉으면서) 에이 더러 운 자식. 아무리 할 짓이 없기로서니 여기까지 와서 날 괴롭힐 게 뭐야. 헤 헤헤......, 오늘은 이만 가겠네. 오래 놀다 가려 했는데 저게 있어서 기분이 잡쳤어. 다음에 또 보세. (망령, 손을 흔들며 퇴장)

-암전-


<6장>

(방장스님의 방. 우측 상수 병풍이 돗자리가 깔려 있고 거기에 방장스님과 탄성이 마주 보고 앉아 있다. 무릎을 꿇고 있는 탄성. 방장스님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탄성 : 스님.

방장 : .......

탄성 : 방장스님.

방장 : (바로 보며) 으응.

탄성 : 아무래도 도법스님을 큰 병원에 입원시켜야겠습니다. 증세가 심상치 않습 니다.

방장 : 보약을 멕여 보지 그래.

탄성 : 기력이 쇠잔해서가 아닙니다. 마(魔)가 씌운 것 같습니다.

방장 : 그냥 둬.

탄성 : 어젯밤에는 저에게 와서 망령이 불상을 부수려 하니 막아달라고 애걸하였 습니다.

방장 : 흔히 있는 일이야.

탄성 : 색계(色界)에 사로잡혀 정사(正邪)를 분별치 못하고 있습니다. 스님께서 직접 만나보심은 어떨런지요.

방장 : 번뇌망상도 다 지 복인 게야.

탄성 : 이제 와서 이런 말씀 드리는게 외람된 줄 아옵니다만, 도법당은 불상제작 의 적격자가 아닌 듯 싶습니다.

방장 : 하하하....... 불상이 뭐 별 거더냐? 그저 돌멩이야. 그 돌멩이로 되뱁이가 법 을 본다면 그것으로 족한 게지.

탄성 : 색계에 집착함도 법을 구할 수 있다는 하교이십니까?

방장 : 어떤 사람은 죄 한번 짓지 않고서도 법을 보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살인 을 하고서도 깨우치는 사람이 있다....... 탄성아.

탄성 : 예.

방장 : 어떤 두 녀석이 나무토막에다 각기 붓글씨를 쓰고 나서 대패로 밀어 보았 어. 한 녀석은 댓번 미니까 먹물이 안 보였고, 다른 녀석은 삼십번을 밀었 어도 먹물이 남아 있었지. 인생은 그렇게 사는 거야. 이것 저것 따지게 되 면 엷은 글씨가 되어버려.

-암전-


<7장>

(요사체 마당. 무대 중앙의 평상에 도법, 탄성, 월명이 앉아 초파일에 쓸 연등을 만들고 있다. 운력시간이다)

월명 : (노래를 부른다) 외로워 외로워서~

탄성 : 허허, 저놈이.......

월명 : (더 힘을 주어) 못 살겠어요.

탄성 : 저놈도 전생의 업장이 두터워서 가수로 못 풀리고 중이 됐지.

월명 : (혼잣말로) 이번엔 삼만원 짜릴 만들어 볼까? 주지스님, 스님들이 꼭 이 런 일을 해야 된답니까?

탄성 : 뭘?

월명 : 이 연등 만드는 것 말예요.

탄성 : 일일부작(一日不作)이면 일일불식(一日不食)이야.

월명 : 좀 쉬운 말로 해요, 쳇.

탄성 : 하루 일을 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수라야, 알아 듣겠 느냐?

월명 : 지 말은 이런 장사를 꼭 해야 되는냐 이 말입니다, 스님들이.

탄성 : 장사라니?

월명 : 아 그럼, 이 종이딱지 원가가 얼마나 된다고 돈 받고 팔아요?

탄성 : 이놈아, 자고로 절이란 초파일 쇠서 여름 나고 칠월칠석 쇠어 가을 나는 게야. 그래야 절도 짓고 스님들도 먹고 살지.

월명 : 절은 더 지어서 뭘 해요? 사방천지가 절이고 있는 절도 개판인데....... 지가 큰스님 되며는 사원건축 불허령을 내리겠어요.

탄성 : 저놈이 무당 푸닥거리 신세를 면케 해주니까 이젠 큰스님이 어쩌고 어째?

월명 : 너무 무당, 무당 그러지 마세요. 울 엄마가 뭐 무당짓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세요?

탄성 : 그럼 사내 밑둥지 맛 보고 싶어서 하던가?

월명 : 스님은 외붕알이라고 합디다.

탄성 : 그럼 네놈은 겹부랄이었더냐?

월명 : 스님은.......

탄성 : 이놈아. 대장부란 아무리 약올려도 성냄이 없어야 되는 거야. 항상 무심 (無心)으로 살아.

월명 : 관 두세요. 저는 금생(今生)에 성불(成佛)은 포기했으니까.......

탄생 : (월명의 허벅지를 세게 꼬집으며) 시급한지고, 네놈의 팔자가.......

월명 : 왜 꼬집어요?

탄성 : 아프냐?

월명 : 그럼 안 아파욧?

탄성 :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그 아픔과 안 아픔이 다 네 마음속에 있느니 라. 월멩아, 알아 듣겠느냐?

월명 : 흥! 제 법명은 월명스님이에요.

탄성 : 돌멩아, 아직도 모르겠느냐?

월명 : 쳇!

탄성 : (알밤을 주며) 공부 좀 하거라. 허구헌 날 애기보살 꽁무니만 쫓아다니니 퉁퉁 불튼 부랄잡고 무슨 공부를 했겠느냐? 그러니 대가리가 맹탕인게지.

월명 : 지가 언제 애기보살 꽁무니만 쪽쪽거리면서 쫓아다녔다고 그래요?

탄성 : 이놈아, 후원보살 딸년은 애기보살이 아니고 무엇이라더냐?

월명 : 아이고, 아이고, 기가 막혀! 걔는 이제 여섯살이에요.

탄성 : (알밤을 주며) 이놈아, 잔소리 말고 잘 새겨 들어. 일체유심조란.......

월명 : 흥! 원효스님의 일체유심조를 모르는 중이 어딨어요?

탄성 : 무슨 뜻이더냐?

월명 : 일체의 것은 모두 마음 먹기 달렸다, 이겁죠.

탄성 : 하면?

월명 : 보름 전에 서울 점박이 보살이 백일기도 하러 내려 왔읍죠.

탄성 : 그래 나도 안다.

월명 : 후원에서 쌀을 씻고 있는 걸 찬찬히 보고 있다가 지가 이렇게 말했지요. ‘네년 젖통이 듬직하구나.’ 그 보살이 열을 받데요. ‘네 이년! 뭘 그리 못 마땅한 눈알로 흘겨 보느냐?’ 그것도 주둥인 뚫렸다고 한 마디 뱉을 기세 에요. 지가 바락 소래기를 질러댔죠. ‘네 이년! 자고로 미련한 년이 젖통만 큰 게야!’ 머리 끝까장 약이 올랐겠죠. 지가 이렇게 한 수 가르쳐 줬습니다 요. ‘화났느냐? 기분이 상했어? 이것아. 그 성냄과 성내지 않음이 다 네 마 음속에 있는 게야. 관세음보살.......’

탄성 : 인석아, 그 보살이 바로 우리 봉국사 화주(化主)보살이야.

월명 : 점입가경이올시다.

탄성 : 좋다.

월명 : 가래를 뱉으려고 칵 했는데 큰아버지가 저쪽에서 오기에 도로 가래를 삼 키고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했지요.

탄성 : 그래서?

월명 : 이때 우린 여기까장 끄집어 낸 가래를 아무 생각없이 먹은 것인데 그 누 런 가래를 책받침에 일단 뱉었다가 먹으라고 하면 못 먹는다 이 말입니다. 재료나 색깔은 똑같은데 마음이 요랬다 죠랬다 요술을 부린 거지요.

탄성 : 을쓰꿍! 어느 똘중한테서 듣긴 들은 모양이구나.

월명 : 뽀뽀만 해도 그래요. 순진한 나로서는 전혀 이해가 안 가지만요, 뽀뽀할 때 상대방의 침을 쪽쪽 빨아 먹는다고 합디다.

탄성 : 예끼, 이 녀석!

월명 : 그 뽀뽀를 이렇게 해보자 이 말입니다.

탄성 : 어떻게?

월명 : 서로 주둥이만 살짝 갖다 대고 침은 각자 사발에 칵칵 뱉어 건네준 다음 상대방의 것을 핥아먹는 거죠. 똑같은 재료에 똑같은 양(量)인데도 병신이 아닌 다음에야 누가 그것을 핥아 먹겠어요? 역시 마음의 조화라 이거죠.

탄성 : 옳고 옳고. 그 아름답고 추한 것이 다 지 마음속에 있는 것을.......

월명 : 결국 사람들은 똥이라면 더럽다고 오도방정 다 떨면서, 밑닦은 다음 똥을 확인하고 휴지를 접고 다시 닦고 다시 확인하고 또 접고 또 닦는, 엉망진 창, 괴물단지라 이겁니다. 더럽다면서 뭘 그렇게 쳐다 본답니까요?

탄성 : 그래 그래, 네놈 말이 맞다.

월명 : 일체유심조라. (방장스님처럼 주장자를 세 번 치는 시늉을 하며) 해가 떠 서 밝다고 보는 것도 한 때의 마음이며, 해가 져서 어둡다고 보는 것도 한 때의 마음인 것이니라. 탄성아, 알아 듣겠느냐?

탄성 : 예, 큰스님.

월명 : 둥근 그릇엔 둥근 물, 각진 그릇엔 각진 물....... 그런데도 너는 그 사실을 잊고 물의 모양에만 마음을 팔고 있어. 돼지 궁둥짝에 목련이야, 할(喝)!

탄성 : 큰스님의 말씀, 명심 하겠습니다.

월명 : 말씀 낮추시게. 손님이 가고 없다고 하여 여관이 없어진 것이 아닌 것처 럼, 자네와 나와의 나이 차이가 어디 가고 없어진 것이 아니지 않는가?

탄성 : 무진법문이옵니다. 하오면...... (월명의 허벅지를 세게 꼬집으며) 이젠 안 아프시옵니까?

월명 : (꾹 참으며) 그 아픔과 안 아픔이 다 이 마음속에 있느니라.

탄성 : 관세음보살......!

월명 : 니미에미타불.......

(그때 원주스님이 쟁반에 먹을 것을 들고 등장한다)

원주 : 아유, 운력시간 한 번 조촐하네요. 스님들이 예비군 훈련이다 뭐다 하여 다들 나갔지 뭐예요. 재무스님이사 그 지체 높으신 양반이 이런 데 나올리 없고.......

월명 : 흥, 주지스님도 나왔는데 재무라고 안 나와.

탄성 : 허허, 이놈이 아무래도 삼천배(三千拜)를 해야 될란갑다.

월명 : 할 때 하더라도 할 말은 해야지요. 지가 언제부터 재무라고 ‘양말 빨아라 신 닦아라’하냐구요. 처녀보살이 오면 ‘월명아 꿀차 타와라’, 할머니보살이 오면 ‘월명아, 먹다 남은 칡차 있쟈?’ 흥! 주지스님이 혼 좀 내야 한다구요.

원주 : (먹을 것을 평상에 내려 놓는다)

월명 : (집어 먹으려 한다)

원주 : 아이구......! (월명의 손을 탁 치며) 우리 큰스님께서 뭐 이런거 다 잡술려 구요. (탄성에게) 자, 드시고 하세요.

월명 : 누군 입이고 누군 주둥이랍니까?

원주 : 어머, 도법스님도 와 계시네. 저는 스님이 서전에 계신 줄 알고 행자 시켜 그리로 보냈는데....... 그나저나 바쁘실테데 어떻게 나오셨어요?

도법 : 이제 다 끝났습니다. 금박만 올리면 되지요.

원주 : 어머 어머, 보고 싶어라. 그동안 참 고생 많으셨어요.

도법 : 고생은요, 걱정이 앞섭니다.

원주 : 아유, 도법스님 하시는 일이 어련할라구요.

도법 : (떡을 먹으면서) 언제 제사 있었습니까?

원주 : 그냥 했어요. 찹쌀떡이에요. 아유, 이번 초파일을 어떻게 쇨지 걱정이에요.

재무스님하고 손발이 맞아야 척척 착착일텐데. 그 답답한 양반하고 대사 (大事)를 치루려면....... 아니, 주지스님은 왜 그렇게 조용하세요? 주지스님 답지 않게?

탄성 : 거 스님은 남자답게 딱딱 끊어서 말할 수 없소? 계집애처럼 재재재재 재 재재재.......

원주 : 어머 어머, 지가 언제 재재재재 재재재재 했어요? 내 참, 내 원 기가 막혀 서.......

탄성 : 그러니까 보살들이 계집애 같다고 맨날 놀려 먹지.

원주 : 체, 바느질에 손놀림만 부드럽다고 칭찬합디다.

탄성 : 쯧쯧.......

원주 : 그럼, 어느 절이고 살림하는 원주가 다 그렇고 그렇지 뭘 그래요?

탄성 : 어깨를 탁 피고 ‘에헴, 요년들 어디 와서 나발나발 대는 거야?’ 이래야지 (원주 흉내를 내며) ‘호호호호...... 흥! 내 참, 내 원 기가 막혀서....... 아이구, 이 오두방정!’ 이게 뭔가?

원주 : 아이구, 언제는 원주 잘 만나 청국장 잘 얻어 먹는다고 아양만 떠시더니 무슨 사내 마음이 요랬다 저랬다 바람난 애기보살 같답니까?

탄성 : 언제 또 바람난 애기보살과 놀아났던가?

원주 : 화두가 없음 조용히 묵상하세요.

탄성 : 자네 걸음걸일 볼 때마다 엉뎅이에서 비파소리가 들리는 거 같아 화두를 들 수 있어야지.

원주 :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답니다.

탄성 : 미련한 년이 젖통만 크답니다.

원주 : 길은 갈 탓, 말은 할 탓!

탄성 : 하하하하, 악담이 덕담이니라.

원주 : 저런 스님이 말하고 싶어서 어떻게 묵언(黙言)했을꼬. 쯧쯧쯧....... 자, 장보 러 가니까 필요한 물건 있으면 시방 말씀하세요.

월명 : 저, 신이 떨어졌는데요.

원주 : 몇 문?

월명 : 대충 사오세요.

원주 : 발 좀 이리 내. (적으면서) 십구 문. 다음부터 외어.

월명 : 또 여름양말 네 켤레요.

원주 : 두 켤레만 사고, 또요?

월명 : 떡 더 없어요?

원주 : 왜요, 있지요. 하지만 적게 먹고 가는 똥 싸셔야죠.

월명 : (탄성의 흉내를 내며) 하하하하....... 원주가 오랫만에 옳은 말 했구나.

원주 : 아니, 조것이. 넌 깜장 고무신이야!

월명 : 여보게 원주, 노여워 말게. 꼬부랑 자지는 항시 지 발등에 오줌 눈다고 안 하던가?

원주 : 아니 아니, 어머.......

월명 : (자기 입을 때리면서) 아이구, 이 오도방정! 그 흔한 부랄마저 없을지도 모르는데.......

원주 : 뭐야? 왼종일 재수가 없더니 이젠 저것까지 깐죽깐죽 대네 그랴!

월명 : 재수가 없을라면 비행기속에서도 독사한테 물려 죽는다고 안합디까?

원주 : 아유, 조게 정말.

도법 : 아, 원주스님!

원주 : (표정을 밝게 하며) 네?

도법 : 붓 좀 사다 주세요.

원주 : 어떤 붓인데요?

도법 : 에, 그게 어느 거냐며는...... 월명아.

월명 : 예?

도법 : 서전에 가서 노랗고 이렇게 두꺼운 붓 좀 가져 와. 탁자위에 있느니라.

월명 : 예.

도법 : 조심해서 다른 것 건드리지 말고.

월명 : 알았읍니다요. (나가려 할 때)

도법 : 열쇠를 가져 가야지.

월명 : (열쇠를 건네 받고 퇴장)

원주 : 또 없으세요?

탄성 : 여기 있소.

원주 : 뭐예요?

탄성 : 브라자 좀 사오시오.

원주 : 브라자요? 어디에 쓰시게요?

탄성 : 당신 주려고.......

원주 : 쳇, 별꼴이야. 제가 뭐 살림하는 중「시판승」이라고 약 올리는 거에요? 나 도 이 짓 하기가 죽기보다 싫다고요. 오십원 짜리고 백원 짜리고 재무스님 한테 죄다 결재 맡아야지, 능구렝이 같은 후원보살 달래야지. 절 살림 해야 지. 요즘은 또 읍네 사람들이 무슨 수작인진 몰라도 우리한테 불매운동을 벌여서 배추씨를 살래도 전주까지 나가야 된다고요. 그리고 뭐, 점방마다 영수증 끊어달라면 옛슈하고 척척 주는 줄 아세요?

탄성 : 그렇게 귀찮은 원주 노릇 뭐하러 해. 속퇴하고 광주 양동시장에다가 한복 집이나 차리지.

원주 : 저도 내년에는 선방에 갈 꺼에요.

탄성 : 열녀전 끼고 서방질 하려고?

원주 : 뭐 스님만 선방수좌에요?

탄성 : 이년!

원주 : 요놈!

탄성 : 봐라. 당신은 이년이고 난 요놈이지.

원주 : 아이구, 포산사 운곡스님도 돌았지. 저런 스님을 제일 수좌로 꼽았으니....... 하심(下心) 좀 하세요.

탄성 : 운곡스님도 당신을 보았다면 마음이 달라지셨을 껄.

원주 : 그럼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장 28절.’

(그때 월명이 헐떡거리며 뛰어 들어온다)

월명 : 스님, 스님. 큰 일 났어요!

도법 : ?

-암전-


<8장>

(도법의 작업실. 녹노 위에 있던 불상이 없다. 화덕에 불을 지피고 있는 도 법. 망령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창가에 걸터 앉아 시(詩)를 읊는다. 탄성 은 중앙의자에 앉아 도법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탄성에겐 망령이 보 이지 않는다)

망령 : 날이 어두워지매 먼저 태어난 자들이

다투어 개새끼가 되고파 안달함이 유행이라 하더이다

그러나 개새끼라고 다 개새끼겠소마는 솔직히 개새끼라면 다 개새끼지요

하지만 모두 다 개소리지요

황금빛 언덕에 누우시려오? 푸른 창공을 날으시려오?

은빛 관세음보살 궁둥이에서 천일염불이 다 무슨 업보라덥니까?

차라리 나무 십자가를 그놈의 정수리에 꽂아박고

천국 안 지옥이 어떠시겠소?

도법 : .......

탄성 : .......

망령 : (도법에게) 천국 안 지옥이 어떠시겠소?

도법 : .......

망령 : 후후후...... 풍랑거지 쪽박 깨뜨린 형상이로군.

도법 : .......

망령 : 잊어버려, 이미 깨져버린 불상에 미련둬서 뭘 하나? 탄성이 말마따나 그 게 다 집착이라고......!

도법 : .......

망령 : 그렇다고 날 원망하지 마. 난 자넬 골탕 멕이려고 그런 게 아냐. 전에 말 했잖어, 부처와는 상극이라고....... 뭐 크게 상극일 것도 없지만, 한 가지 아 쉬운 것은 나와 부처와의 관계를 정확히 설명할 수가 없단 말이야. (방금 떠오른 듯)아, 그렇지. 내가 호랑이라면 자네가 만든 불상은 고양이었어. 호랑이는 고양이를 보면 가만 놔 두지 않거든. 어설프게 닮았다 이거지. 나 도 그래. 자네가 만든 부처라는 게 날 어설프게 닮았단 말씀이야. 헤헤 헤....... 그래 맞아. 그래서 그런거야. 이젠 속이 다 후련하군. (일어나서 찬 장으로 간다) 이렇게 쉬운 걸 가지고 그동안 끙끙앓았으니....... 어때, 이젠 자네 속도 후련할 걸? 헤헤헤....... (찬장에서 설탕을 꺼내 찍어 먹는다)

탄성 : 누군지 짐작 가는 사람이 있나?

도법 : .......

망령 : 내가 그랬지.

탄성 : 바람이 넘어뜨렸을 리도 없고.

망령 : 내가 그랬다니까.

탄성 : 혹시 월명이가 덜렁대다가?

망령 : 저 병신.

탄성 : 대중스님들은 자네 짓이라고 하드만. 두 가지 이유를 대더군. 첫째는, 마 음에 들지 않았거나 자신이 없어서...... 둘째는, 잠시 실성을 했거나 환각에 빠져 그랬을 거라고....... 덧붙여 말하길, 요즘 자네 행동으로 보아서는 후자 가 합당할 거라고.

도법 : 차 들텐가?

탄성 : 그러지.

망령 : 좋지.

도법 : 결명자?

망령 : 좋아. 달착지근하게 끓이게.

탄성 : 아니, 담백한 것으로.

도법 : 칡차?

망령 : 에이 싫어.

탄성 : 좀 무겁지 않나?

도법 : 작설차?

탄성 : 그래, 그게 좋겠군.

망령 : 난 싫여. 그걸 무슨 맛으로 먹어.

탄성 : 자넨 제 맛을 낼 수 있을 꺼야. 월명이가 끓여 오는 것은 어디 그게 차인 가?

망령 : 양잿물이지.

탄성 : 구정물이지.

망령 : 어이, 도법당! 나도 한 잔 줘. 이리 가져오지 말고 그냥 거기다 놔. 괜시 리 이리 가져 오면 탄성당이 자넬 돈 사람 취급 할테니까.

도법 : (화를 억제하다 못해 망령에게로 간다)

망령 : (뒷걸음치며) 왜 이래?

도법 : 왜 이래? 참는 데에도 한도가 있는 거야. 도대체 넌 어떤 놈이야. 내가 너 하고 무슨 억겁(億劫)의 괴연(怪緣)을 졌는지 말해보란 말이야.

망령 : 탄성당이 비웃어, 저 혼자 연극한다고.

도법 : 불상을 부수고 종국에는 어쩌자는 거야.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망령 : 허허. 탄성당이 쳐다 본대두?

도법 : 꺼져, 사생결단(死生決斷) 내기 전에 어서 꺼지란 말이야.

탄성 : (도법을 붙들며) 도법당, 왜 이래? 이 무슨 경거망동(輕擧妄動)이야.

망령 : 옳지 옳지.

탄성 : 정신 차려.

망령 : 아암, 탄성당이 내 대신 혼내 주게.

탄성 : (잡았던 것을 풀며) 허공에다 성낸다고 박살난 조각이 다시 붙어지겠나?

망령 : 에이, 한 대 쥐어 박을 것이지.

탄성 : 찻물이 다 닳겠네.

도법 : (체념한 듯 화덕 있는 데로 가 작설을 넣는다)

망령 : 그나저나 대단히 발전했어. 처음 봤을 땐 졸도 하더니....... 똥줄 타면 다 그 런가?

탄성 : (의자에 앉으며) 이건 다른 얘기네마는 난 자넬 이해할 수가 없어. 나야 뭐 절이 뭐하는 데인지도 모르는 채 요만할때 계(戒)를 받았지만 자넨 왜 중이 됐나? 듣자하니 그림 솜씨도 꽤 알아줬던 모양인데. 자네도 허무주의 자(虛無主義者)였나?

망령 : 마누라가 겁탈당했거든.

도법 : (망령을 쏘아본다)

망령 : 아, 미안해, 그 상처는 건드리지 않도록 하지.

탄성 : (도법의 시선을 따라 살피다가) 왜 그래?

도법 : 쥐새끼가 많아.

망령 : 뭐야? 쥐새끼? 저런 고얀놈 같으니.......

도법 : (찻잔을 건넨 다음 의자에 앉는다)

탄성 : (합장한 뒤 차를 마시면서) 아무튼 아주 잘된 일이야. 그렇잖아도 자네가 만든 불상을 보면서 예불 드릴 일이 끔찍했었는데.

도법 : (차를 마실 뿐)

탄성 : 다시 만들 셈인가? 큰법당에 있는 불상도 아직 쓸만하니까. 웬만하면 그 만 두지 그래. 초파일도 이젠 며칠 안 남았어.

망령 : (주전자 채로 마시면서) 그래, 아예 그만 둬.

탄성 : 망령이란 묘안이었어, 그렇지? 이 시점에서 합리화시킬 수도 있고 포기할 수도 있게 되었으니까.

도법 : (차를 벌컥 벌컥 마신다)

탄성 : 차는 그렇게 마시는 게 아니야. 천천히 사색하면서 느낌을 갖고.

도법 : 탄성당, 내 말을 믿게. (이내 낙담해서) 하긴 믿어서 풀릴 문제도 아니야, 그래, 내 문제겠지.

탄성 : 선방에 가버려.

도법 : 아, 모르겠어. 내가 나를 모르고 지나는 게 너무 많아.

탄성 : 솔직히 대중스님들 보기가 민망할 지경일세.

도법 : 용서하게.

탄성 : 의기양양하게 써서 보낸 봉안식 초청장이 날 아찔하게 만들고 있어.

도법 : 이젠 다 끝났어. 모두 참회하고 용서받고 싶어. 그동안 고마웠네. 어찌 보 면 홀가분하기도 해.

망령 : 그래, 그래, 마음 잘 먹었지. 또 만들면 또 부숴야 돼.

탄성 : 떠나겠나?

도법 : 가야지. 죄송스러워서라도 눌러 있을 수 있겠나?

탄성: 그런 이유라면 남아 있고.

도법 : 아니야

망령 : 집으로 가. 가서 마누라를 찾아 보라고.

탄성 : 선방에 가련가?

도법 : 생각해 봐야지.

탄성 : 불상 제작도 집어 치우고?

도법 : 응.

탄성 : 다시 생각해 봐.

도법 : 생각하고 말 것도 없어

탄성 : 자식, 비겁한 놈이군.

도법 : ?

망령 : 저 자식 왜 저래?

탄성 : (벌떡 일어서며) 이놈아, 너는 부처님과 약속한 거야. 애초에 방장스님의 명(命)을 받아 초파일까지 완성하겠다고 한 것부터가 부처님과의 약속이란 말이야.

도법 : 보름 밖에 안 남았는데 나더러 어떻게 하란 말이야.

탄성 : 앞으로 보름이나 남았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도법 : 보름 가지고 될 것 같애?

탄성 : 임마, 그걸 나한테 물어? 돼지우리 장판을 만들더라도 약속은 지켜야지.

망령 : 아니...... 저...... 저 자식이 산통 다 깨네.

-암전-


<9장>

(방장스님의 방.방장스님 앞에 무릎 꿇고 앉아있는 도법)

방장 : 거...... 기괴한 일이다.

도법 : 제 말이 믿기지 않습니까?

방장 :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도법 : 하면 환청(幻聽)이라는 뜻입니까?

방장 : 아니지.

도법 : 방장스님, 이번 일은.......

방장 : 무엇이 가장 무섭던고? 그 모양인가?

도법 : 아닙니다.

방장 : 하면?

도법 : 전체가 다입니다.

방장 : (생각에 잠긴다)요새 앵두가 나올 때던가?

도법 : 아직 이릅니다.

방장 : 그럼 딸기는 나왔겠지?

도법 : 예.

방장 : 난 딸기보다도 앵두가 맛있더군. 앵두는 요만한 게 씨가 커서 먹을 게 별 로 없거든. 발라 먹어야 되지. 그러니까 맛있어. 언제 앵두를 보게 되면 요 만큼만 갖다 줄란가?

도법 : 예.

방장 : 많이 가져 와도 못 먹어

도법 : 예.

방장 : 내가 요즘 몸이 나빠. 되지도 않는 참선한답시고 몸만 버렸지. 그래서 며 칠 전에 운동삼아 몰래 아랫마을에 내려가 보았어. 왜 시장 모퉁이에서 한 약방 하는 노인 있잖은가?

도법 : 예.

방장 : 절이 시끄러워진 뒤론 한동안 못 봤거든. 약도 짓고 한담(閑談)도 나눌 겸 해서 찾아 갔더니만, 죽을 때 다 된 놈이 무슨 놈의 몸보신이냐면서 술 이나 몇 사발 받아줄테니 따라 오라는데, 딴엔 그래. 해서 나섰지. (꾸벅 꾸벅 존다)

도법 : 저...... 스님.......

방장 : 응?

도법 : 저어.......

방장 : 아, 내가 어디까지 말했지?

도법 : 약주(藥酒)...... 드시자고.......

방장 : 아, 그래 그랬어. 그래서 따라 갔지. 가다가 어물전 앞에서 거지를 봤는데 그 녀석이 희한한 놈이더군. 옆으로 기어 다니면서 동냥하러 다니는데 왼 통 얼굴을 보자기로 싸맸더란 말이야. 그런데 멀쩡한 놈 같지 않겠나? 해 서 지나가는 척 하다가 보자기를 싹 벗겨 보았지. 아뿔싸! 그게 아냐. 뭐에 어떻게 됐는진 몰라도 얼굴이 몹시 상했어. 그러니 내가 얼마나 난처했겠 나. 거지는 거지대로 능욕당했다는 생각이 들어 막 싸우려 들지, 시장사람 들은 삥 둘러서서 늙은 땡초 어떻게 당하나 두고 보자는 식으로 야멸차게 구경하지...... 한약방하는 친구가 없었으면 크게 혼날 뻔 했지...... 자네, 정종 (正宗;淸酒) 먹어 봤나?

도법 : 예.

방장 : 속가에서?

도법 : 예.

방장 : 참 좋대. 그게 한 병에 얼만가?

도법 : 모르겠는데요.

방장 : 비싸겠지?

도법 : 그렇게 비싸진 않을 겁니다만.

방장 : 그래? 다음에 올 때 그것도 사다 줄란가?

도법 : 예.

방장 : 몰래 가져 와야 돼.

도법 : 예.

방장 : 그날 밤 정종을 여러 잔 마셨어. 얼굴이 부한 게 말이 많아지더군. 뭐 이 런 저런 얘길 했는데 거지 얘기가 제일 많았지. 따지고 보면 인간이란 다 거지거든. 빈 몸뚱이에 빈 껍데기지. 해서 김삿갓부터 천사촌 거지왕초 천 팔만이, 그리고 청라골 과부거지 등등. 근데 말이야, 한약방 하는 친구가 거지에 대해서 아는 게 많더군. 하나가 그럴 듯 하더란 말이야. 들어 볼란 가?

도법 : 예.

방장 : 중국 어느 지방에 거지가 있었는데 거지랄 수도 없는 거지였어. 왜냐하면 아주 비싼 목걸일 하고 다녔거든. 그런데 거지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자기는 땡전 한 푼 없는 거렁뱅이로만 여기고 있었어. 그러다가 우연히 옛 친구를 만났는데 자초지종(自初至終) 얘길 들은 친구는 깜짝 놀랐지. 그 목걸일 보았던거야. 그래서 알려줬지. “이 친구야, 자네 목에 값비싼 진주 목걸이 가 있는데 뭐하러 동냥하러 다니는가. 그걸 팔아 장사를 해도 큰 장사를 할 수 있을 텐데.......” 거지는 그제서야 그걸 알고 기뻐했지. 얼마나 기뻤겠 어. 거지가 기뻐서 길길이 날뛰는 걸 보고 친구가 또 말했지. “이 친구야. 그 목걸인 본래부터 네 것이었어. 어디서 주은 게 아니야. 그런데 뭘 그렇 게 좋아하는 거지?” (자신의 얘기에 재미있어 큰 소리로 웃는다) 본래부터 자기 것인 것을, 이제 생겨난 양 기뻐하는 꼴이 얼마나 우스웠겠나. 하하하 하, 모든 것이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지, 안 그래? 하하하하.

도법 : 저어...... 방장스님? 제가 여쭙고자 하는 것은.......

방장 : (손을 저으면서) 자기의 의지처는 자기인 것이야. 삼라만상이 다 내 것인 데 그 무엇이 부족할꼬.

도법 : ......?

방장 : (주장자를 세 번 치고 화를 버럭 내며) 돼지 궁둥짝에 목련이야! 할!

-암전-


<10장>

(어둠속에서 천둥소리, 이어서 소나기와 번개불이 무대를 가른다. 용명되면 도법의 작업실. 망령은 의자에 앉아 술을 마시고 도법은 창가에 서서 소낙 비를 보는 듯 뒷모습을 보이고 있다)

망령 : (거나하게 취해서 흥얼댄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도 법당, 이리 와서 한 잔 하자고. (대답이 없자) 비구경 처음 하나? 이 비는 금방 그쳐. 지나가는 비거든. 도법당, 이리 와서 회포나 푸세. 실은 오늘이 마지막이야. 난 이 밤이 지나면 여길 떠나야 한단 말일세. 이제 가면 오고 싶어도 못 와. 허허 내 말이 안 들리나? 술 생각이 나서 찾아온 친구에게 이건 너무 하지 않나?

도법 : .......

망령 : 헤헤헤. 그래도 난 자네가 좋아. 재주꾼이거든, 그에 비해 겸손하고. 헤헤 헤....... (자작한다) 도법당, 나에 대해 궁금한 게 많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할 수 있어. 입산할 때 만큼이나 착잡하고 고통스러울 테니까. 불상문 제도 그렇지, 탄성이도 그렇지, 게다가 비까지 오고 있으니까. 자넨 예나 지금이나 빗방울만 보면 맥을 못추누만. 그래가지곤 중이 될 수 없어. 너무 감상적이야. 하긴 옛날에도 자네같은 녀석이 하나 있긴 있었지. 유명한 놈 이야. 조주(祖疇)스님이라고. (詩를 읊는다)

독좌시문낙엽빈(獨座時聞落葉頻)이니

수도출가등애단(誰道出家憎愛斷)고

사량불각루첨건(思量不覺淚沾巾)이라

홀로 앉아 낙엽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제

누가 말하였던고 출가하여 도를 닦으면 사랑과 증오가 끊어진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깨우치지 못하니 흐르는 눈물이 수건만 적시누나

헤헤헤. 그 자식의 무상시(無常詩)지. 십년간 토굴에서 면벽(面壁)했지만 힐끗 본 치마때문에 도로 헬까닥 했다는 얘기야. (밖을 본다) 아! 비가 그 쳤군. 거 봐. 내 말이 맞다니까. 자, 이젠 술 좀 마시자고, 응? 오늘이 마지 막이라니까. 자, 어서.

도법 : (의자에 앉는다)

망령 : (건너편 의자에 앉으며) 미루주야. 맛이 그만이지.

도법 : (한 입에 털어 넣고 다시 잔을 내민다)

망령 : 한잔 더?

도법 : (연거푸 세 잔을 마신다)

망령 : 맛있나? 아니면 오긴가?

도법 : 이젠 어디로 갈 꺼지?

망령 : 하늘 나라로.

도법 : 그래?

망령 : 실은 갈 데도 없어. 자네가 하두 싫어하니까 아무 데나 가려는 게지. 그냥 있어도 되겠나? 그건 싫지?

도법 : 그리 싫지도 않아.

망령 : 그래?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내가 무섭지 않나?

도법 : 도대체 네 정체가 뭐야?

망령 : 나도 한 잔 주게.

도법 : (따르며) 원포리 지물포집 혼령인가?

망령 : 그 말 귀치 않고.

도법 : 그럼 아무 관계도 없단 말인가?

망령 : 난 몰라.

도법 : 그런데 왜 그 시체속에 있었지?

망령 : 무슨 소리야. 난 나야. 내가 도대체 어디에 있었다는 겐가?

도법 : 네놈이 그때 벌떡 일어섰잖아.

망령 : 허허, 정신차리게. 뭘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구먼.

도법 : 거짓말 말어. 여기 처음 나타났을때도 구면인 사이에 뭘그리 놀래느냐고 안그랬어?

망령 : 그래? 그럼 그렇다고 하지. 그런데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

도법 : (잔을 비운다)

망령 : (따르며)헤헤헤. 아직도 내가 징그러운가? 도법당! 도인이 되려면 하나로 볼 줄을 알아야 돼. 자비와 해탈은 일승(一乘)이거든. 네 속마음이 내 겉모 양일 수도 있다 이거야, 안 그래?

도법 : 훈계하려 들지 말어.

망령 : 훈계가 아니야. 사실 자네의 속것이야 내 얼굴에 비하겠어? 벳겨보면 더 가관일테지?

도법 : 말하고자 하는 게 뭐야?

망령 : 자네의 화두지.

도법 : 내 화두가 어때서?

망령 : 어떻긴? 엉터리지. 어떤 사람이 잠자고 일어나 거울을 보니 얼굴이 없어 졌다. 어디로 간 것이냐? 가긴 어디로 갔겠어. 늘 거기에 처박혀 있는 것 을. 진짜란 오고 감이 없어. 있고 없고가 없어.

도법 : (외면한다)

망령 : 허허, 이 사람. 아직도 내 말을 못 알아 듣는구만. 자넨 이제 고양이가 아 니라 진짜 호랑이가 된거야. 됐다 치고 나를 보라고.

도법 : .......

망령 : 못 쳐다 보는건 또 뭔가. 죄의식이 다시 발동한 건가?

도법 : .......

망령 : 마누라가 불쌍하겠지.

도법 : 뭐야?

망령 : 마누라!

도법 : (강한 반응)

망령 : 마누라가 불쌍하겠다고.

도법 : (노려 본다)

망령 : 아하, 알았네. 술 맛 잡친다 이거지? 다른 얘길 하자구, 도법당. (묘한 웃 음을 입가에 흘리면서) 자고로 술이 있으면 계집이 있어야 흥이 난단 말일 세. 안 그런가? 내 이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해뒀지. 자네도 계집이 필요한 가? 필요없지? 그럼 내것만 부르겠네. (손뼉을 치며) 어서 들어 와라.

(짙은 화장을 한 여인이 들어 온다)

망령 : (여인을 보며)옳지 옳지. 사뿐 사뿐. (도법에게) 괜찮은 아이지. 서울 무 슨 술집인가 하는 데서 비싸게 주고 사왔다고. (여인에게) 자, 인사해. (도 법에게)아마 구면일 껄?

도법 : (여인을 보자 깜짝 놀란다) 아니.......

망령 : (여인에게)어서 인사해. 아 참, 얜 말을 못 해. 그러니 인사하고 싶으면 자네나 하게.

도법 : 아니...... 이럴 수가.

망령 : (여인에게)뭘 꿈적거려. 어서 여기 앉지 않구. (옆에 앉힌다. 여인의 가슴 속에 손을 넣어 주무르면서) 아이구, 처녀처럼 보송보송하군. 도법당, 자네 또 생떼 부리지 말어. 이젠 이 아이는 내 계집이니까, 자고로 버린 계집 미 련두는 녀석이 제일 못난 사내라구.

도법 : 아니......!

망령 : 얜 내가 최면을 걸었어. 너에 대한 기억을 싹 빼 버렸지. 얘한텐 넌 그냥 남자야. (여인에게) 여기 왔으면 신고식을 해야지.

여인 : (망령에게 입을 맡춘다)

도법 : 그 손 놓지 못해?

망령 : 왜?

도법 : .......

망령 : 아하! 왕년에 얘 남편이었다? 이젠 아무 것도 아냐, 안 그래? 십년 전쯤일 까? 동네깡패 일곱명에게 강간당한게? 그때 자넨 꽁꽁 묶여 있었고 얘는 그녀석들한테 차례로 당했지.

도법 : 그만해.

망령 : 그만하긴. 이미 엎지러진 물인데. 자넨 차례로 다 보았지. 처음엔 녀석들 이 윗도리를 벳기고 다음에 치마...... 속것도 벗기고, 자넨 소리 소리 질렀 지. 질러봐, 그때처럼. ‘살려줘! 살려줘! 이놈들아, 제발 그만 두란 말이야!’ 그리고 그 순간 외면해 버렸어. 낄낄거리는 그 녀석들의 웃음과 함께 모든 게 끝장나 버렸지. 넌 곧장 입산했으니까.......

도법 : .......

망령 : 괴로운가?

도법 : (노려 볼뿐)

망령 : (빈정대며 詩를 읊는다)

우리 모두 사랑하는 이를 갖지 말자

우리 모두 미운 이를 갖지 말자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운 사람은 만나서 괴로우니

그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이

모두 다 고통이 아니겠소

도법 : (과장된 표현) 아암, 고통이지. 고통이고 말고. 그러니 어떻게 할까? 저 마나님 붙잡고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까? 아니면 통곡이라도 할까? 네가 원 하는 게 뭐야? 말 좀 해봐, 이 자식아!

망령 : (여인에게) 얘야, 안되겠다. 저 녀석의 발작병이 다시 도진 모양이다. 어 여 인나서 선을 보여. 네 멋진 춤으로 저 녀석의 혼을 싹 빼버려.

여인 : (일어나 춤을 춘다. 춤추며 옷을 하나씩 벗는다)

망령 : 쟤는 그래도 됐어. 왠만한 계집 같았으면 죽는다고 난리 법석을 피웠을 텐데. 저렇게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줄 안단 말이야. (춤을 추며) 옳지 옳 지. (도법에게) 옛날하고 똑같은 몸매지? 후후후.

도법 : 그만 하라고 해.

망령 : 그만 하라니. 그만 두면 만사가 다 끝이 나냐? 네놈은 매사가 순간 순간 이야. 저 술집계집이 여기서 벗지 않는다고 다른 데서도 안 벗을 줄 알어. 천만에 말씀. 그게 저 년의 직업인 걸.

도법 : .......

망령 : (술을 마시면서) 잘 봐. 거기서 떠오르는 것이 있을꺼야.

도법 : .......

여인 : (슈미즈 차림의 알몸이 된다)

도법 : 그만 해, 그만 두란 말이야!

망령 : 저걸 어려운 말로 묘유(妙有)라고 하지. 묘하게 있다 이거야. 저년을 잘 봐. 저게 영원히 있는 걸까? 아니지. 언젠가는 없어진단 말이야. 그러니까 없는 거지. 그렇담 완전히 없는 거야? 그것도 아니지. 있긴 있지. 묘하게 있는 거지.

도법 : (망령의 멱살을 잡으면서) 시끄러, 이 새끼야.

망령 : 허허. (도법의 두 손을 쉽게 꺾어 눌러앉힌다) 자넨 어째서 이 순간을 영 원하다고 생각하지? 인생이 순간이면 영원한 건 없고 인생이 영원하면 순 간이란 없을 텐데 말이야. 이건 앞뒤가 맞질 않아. 마누라가 강간당한 건 영원하고 마누라를 사랑했던건 순간이라니 이런 엉터리 발상이 어디 있나.

여인 : (속옷 차림으로 춤을 춘다)

망령 : (도법의 얼굴을 똑바로 들게 한다) 자비의 시선으로 저것을 봐. 봤어? 봤 으면 이리 와. (도법을 일으켜세워 탁자있는 데로 와서 의자에 앉힌다) 불 쌍하지?

도법 : .......

망령 : 저 년이 불쌍하지?

도법 : .......

망령 : (손뼉을 친다)

여인 : (춤을 멈추고 망령의 옆자리에 앉는다)

망령 : (여인을 안으며) 옳지 옳지. 춤추느라 몸이 뜨거워졌구나. (도법에게) 뭘 그리 뚫어지게 보나? 계집 한 둘 안아봤어? 오호라! 너도 한 번 안아보고 싶다 이거지? 암, 그래야지. 조강지처인데 뼈가 으스러지도록 안아봐야지. (여인에게) 얘야, 저리 가서 저놈 좀 주물러 주어라.

여인 : (도법에게로 간다)

도법 : (여인의 얼굴을 뚫어지게 본다. 눈시울이 붉어진다)

망령 : 네 마누라는 변한 게 없어. 저 년은 아직도 너를 생각하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당한 건 죄가 아니야. 그건 새끼손가락에 난 생채기에 불과해. 변 한 건 너야. 네가 잘못 본거지. 아니, 잘못 본 것도 아니야. 잘못 본 줄 뻔 히 알면서도 시정하지 않았으니까. 범부(凡夫)의 세속이란 다 그래.

도법 : (여인을 휙 밀쳐 버린다) 그래 난 범부야. 속인이구 죄인이구 머저리야.

망령 : (바닥에 넘어진 여인을 일으켜 자기 옆자리에 앉힌다)

도법 : 물론 내 처는 아무 잘못도 없어. 그걸 나도 알아. 이치상으론 확실히 그 래. 하지만 난 그일을 지울 수 없어. 지우려고 노력이야 했지, 잊어야 한다 고...... 그러지 않으면 저 여자나 나나 불행해진다고. 허지만 소용없는 일이 었어. 말갛게 지울 수가 없었다고. 버선 콧배기만 보아도 그 일이 떠오르는 걸 낸들 어쩌란 말이야. 어떤 놈이든 붙잡고 물어봐. 지 마누라가 강간당하 는 걸 보고, 저건 색(色)이요 저건 공(空)이니 집착하지 말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겨 버리라면 어떤 미친놈이 그대로 따르겠어. 없어. 그런 놈은 세상에 없어.

망령 : 왜 없어. 있어. 쌔구 쌨어.

도법 : 그런 자들은 인간이 아니야.

망령 : 인간이야. 그런 썩은 동태눈알 가지고 무슨 도(道)를 닦겠다고 그래. 이놈 아, 너와 마누라는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건으로 똑같이 당했어. 둘 다 시 궁창에 빠진 거야. 그런데도 너는 말짱하고 마누라만 더럽다 이거야.

도법 : 더럽다고 말한 적 없어.

망령 : 그게 그거지 뭘 그래. 마누라를 버리고 네놈만 도망쳐 나왔으니 그게 결 국 더러워 못살겠다는 것과 뭐가 달라.

도법 : 불리지 말어. 난 그 일을 말갛게 지울 수가 없다는 것 뿐이야.

망령 : 누가 말갛게 지우래? 만약에 네 마누라가 당하는 걸 직접 보지 못했고 그 후로도 눈치채지 못했다고 가정해 보자. 어떻게 했겠어?

도법 : 차라리 그 편이 나았겠지.

망령 : 그런 어벌쩡한 말이 어딨어. 안보면 괜찮고 보면 안되고.

도법 : 더 이상 듣기 싫어.

망령 : 그럴려면 뭣하려 중이 됐으며 불상은 왜 만들었어? 법(法)을 보려고 했던 거 아냐? 그 법이 여기에 있는데 넌 지금 어디서 찾고 있는 거야, 이놈아!

도법 : 법(法)이란 고통과 좌절의 아픔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입장에서 얼마큼 견뎌 왔느냐에 달려있어. 나는 그 모든 법난(法難)과 정면으로 맞 서 싸워왔고 그 좌절의 깊이만큼 지금은 상처가 아물게 되었던 것이야. 알 겠어?

망령 : 아니, 모르겠어. 본디 그 일이 어떤 상처였으며 이제는 어떤 법으로 어떻 게 아물게 되었다는 건지 엉망진창이라고. 다시 말해봐, 아주 쉽게.

도법 : 당해보지 않은 놈은 몰라. 방앗간에서 지 멋대로 떡 주무르듯이 옆에서 이러쿵 저러쿵 떡방아 찧지 말란 말이야.

망령 : 헤헤헤. 자, 그럼 난 잠자코 있을테니 네가 찬찬히 설명해 봐.

도법 : 알 필요없어.

망령 : 난 알아야겠어

도법 : 왜?

망령 : 네놈이 불쌍하고 마누라가 불쌍하고 또 우린 같은 호랑이니까.

도법 : 네 주제를 먼저 알아.

망령 : 헤헤헤. 뭐래도 좋아. 설명해 봐.

도법 : 너한테 설명하느니 강아지에게 거문고를 가르치겠다.

망령 : 설명해 봐!

도법 : 싫어.

망령 : 그럼 내가 설명해보지. 그러니까 깡패들이 네 처를 이렇게 눕혀놓고 그 짓을 했다, 이말이지? (여인을 탁자에 눕히고 당시를 재현하려 한다)

도법 : 손 떼.

망령 : 못 떼.

도법 : 안 떼겠어?

망령 : 못 떼겠다면?

도법 : (헤라를 집어 들며) 죽여 버리겠어.

망령 : 상처가 아물었담서?

도법 : 입 닥쳐, 이놈아.

망령 : (여인의 옷을 벗긴다) 난 진짜야 너도 그렇고. 우리 서로 그러기로 했잖 어.

도법 : 그만두지 못하겠어?

망령 : 우리끼리 서로 삭이지 못할 게 무어 있겠나.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무 욕무탐(無慾無貪)인걸.

도법 : 똑바로 들어. 마지막 경고야.

망령 : 도법당. 자넨 파리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할 머저리라고.

도법 : 너같은 녀석은 파리 목숨만도 못해, 이 녀석아!

망령 : 멍청한 자식. 이놈아, 큰소리 치지 말어. 넌 개자식이야.

도법 : 개자식이라도 좋으니 거들먹거리지 말고 어서 꺼져버려.

망령 : 누구 마음대로?

도법 : 어서!

망령 : 좋다. 마음대로 해봐. 어디 악마가 이기나 까까중이 이기나 해보자고.

(여인을 애무(愛撫)하려 한다)

도법 : 야!

망령 : (태도를 돌변한다.) 헤헤헤...... 참게 참아. 한 번 해본거야. 우리가 이럴 필 요가 있겠어. 잠시 머리도 식힐 겸 휴전을 하자고. 결론을 내릴 때가 되었 으니까....... 아는 노래가 있음 한 곡조 불러보게...... 막간을 이용해서 유서(遺 書)라도 써놓던지.

(창가로 가서 창문을 여는 망령. 심호흡을 몇 번 한다. 잠시 후)

망령 : 적개심으로 불타고 있군. 누구에 대한 적개심인가?

도법 : 내 자신에 대해서지.

망령 : 뜻밖인걸?

도법 : 악마를 눈앞에 두고도 가만히 있는 내 자신이 얄미워서 그래.

망령 : 참게나. 그러다가 그 적개심으로 속마음까지 불타버리겠어.

도법 : .......

망령 : 자, 시작해볼까?

도법 : .......

망령 : 이제부터 자네에게 마지막 최면을 걸겠어. 자넨 오늘 우리의 마지막 이별 을 그 헤라로 끝내야 돼. 알겠나? 중요한 건 긍정이냐 부정이냐만 남아 있 어. 아까 한 말 생각나지? 얼굴이 있어도 진짜요, 없어도 진짜라는 말. (여 인의 옷을 벗기고 애무한다. 빠른 행동. 극(劇)에 속도감이 붙는다) 어떤 가? 보기 싫은가? 보기 싫음 지금 네 눈을 찔러버려. 그런 썩은 눈알이라 면 앞으로 계속 보아봤자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해. 사실 이런 일은 전에도 있었거든? 넌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야. 그런데도 보기 싫어 미치겠다면 그거야말로 머저리지. 뭘 망설이나. 찌르라니까....... 옳아! 그렇담 이 모습이 보기 싫지 않다 이거지? (더욱 격렬하게 애무하며) 보기 좋은가? 참을 수 있겠어? 색즉시공이야? 부처의 자비야......? 보기 좋대두 지금 찔러버려. 이 젠 안 보여도 자넨 자유자재(自由自在)함이야. 자넨 지금 마누라가 당하고 있는데도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시선으로 보고 있어. 그러니 미추(美醜)가 따로 없음이지. 뭘 해. 어서 찌르라니까. 만약 이런 저런 연유로 찌르지 못한다면 자넨 이 끈적끈적한 속세에 아직도 미련이 많다는 것이고 결국 이런 식으로 더 확실한 것, 더 구체적인 것을 찾다가 종내엔 아수라(阿修 羅)가 되어 육도윤회(六道輪廻)를 거듭하게 될 것이야. 망설이지 말고 어 서 찔러! 어서! (더욱 세차게 여인과 정사한다)

도법 : (헤라를 집어든다.) 개자식.

망령 : 그래 그래. 어서 그걸로 두 눈을 찌르라니까?

도법 : (망령에게 다가서며) 더 이상 못 참겠어.

망령 : 왜 나한테 덤벼들어. 자네 두 눈을 찔러버리라니까.

도법 : 흥! 네놈도 오늘로써 끝장이야.

망령 : 그래? 죽여봐라 이놈아.

(더욱 격렬하게 정사하는 망령과 여인. 격정적 감정에 휩싸인 도법, 헤라를 양손에 들고 부들 부들 떤다. “야!”하는 소리와 함께 망령을 마구 찌르는 도법. 순간, 암전. 용명(容明)되면, 도법에게 한정된 불빛. 쪼그려 앉은 채 로 양손으로 두 눈을 감싸고 있다. 눈에서 피가 흘러 내린다. 망령, 불상을 조각하던 녹로 위에 앉아있다)

망령 : 자넨 나를 죽이려고 했지만 결국 자네의 두 눈을 찌르고 말았어. 난 자네 의 번뇌와 불안일세. 세상 이치가 일체유심조라. 난 바로 자네일세. 자넨 자네의 추악한 부분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어. 그러나 이젠 보았겠지. 자네 의 다른 한 부분이 얼마나 추악했던가를....... 결국 아름답고 고귀하고 깨끗 한 것만 찾아 헤맨 자네의 동태눈알이 자네 두 눈을 찌른 거고, 자네 적개 심이 바로 자네 마음을 찌른 거야. 도법당, 미추(美醜)를 포기하게. 아름답 고 추함이란 한낱 꿈속의 허깨비에 불과한 것이야. 본디 이 세상 모든 것 은 묘하게 있을 뿐, 미추란 없는 것이야. 그것을 자꾸만 추하다고 보는 자 네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일세. 도법당, 내 몸에 석고를 입히도록 하 게.

(숙연해지는 무대. 범패(梵唄)소리 크게 올리다 사라지면)

망령 : (지금까지의 말투가 아니다. 부처의 설법(說法)처럼 들린다) 바닷가의 조 약돌은 둥글고 예쁘지. 그 조약돌을 그토록 매끄럽고 아름답게 깎은 것은 조각칼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인게야. 난 흉칙하지도 않고 또한 귀신도 아니지. 자네가 스스로 그렇게 보고 있을 뿐이야....... 나와 싸우려 들지 말게. 칡넝쿨이 보리수를 휘어감듯이 자네가 싸우려 들면 우린 서로 파멸하고 말어.

도법 : .......

망령 : 자, 이젠 자네의 외부를 보려고 하지 말어. 하늘에도 바다에도 산에도 들 에도 자네가 벗어날 곳은 아무 데도 없어.

도법 : .......

망령 : 우린 태어날 때부터 완성자였어. 범부들은 이것을 몰라. 모든 것이 목탁구 멍속의 작은 어둠이지.

도법 : 우린 태어날 때부터 완성자였지.

망령 : 범부들은 이것을 몰라.

도법 : 그래! 모든 것이 목탁구멍속의 작은 어둠이지. (소리없이 울먹인다)

망령 : (불상을 조각하던 녹노 위로 올라가 앉는다) 도법당! 이젠 더 이상 자네 가 만든 불상에 연연해하지 말게. 그건 자네의 우문우답(愚問愚答)이 내린 엉터리 불상이었어. 그 불상은 깨진 것도 아니었고 없어진 것도 아니었어. 그것 역시 자네의 우문우답이 내린 묘안이었겠지. 더 이상 감추지 말게. 이 젠 마음속에서부터 깨끗히 그 불상을 지워버려. 도법당!

어떤 사람이 인적 끊어진 숲속을 헤매다가

아득한 옛날 자신이 살았던 낡은 집을 발견하였네

그 집에는 연꽃과 보리수(菩提樹)가 있었지

나도 이와 같이 옛날 먼저 깨우친 분들이 걸어갔던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옛길을 발견했을 뿐이야

(그때 천둥과 번갯불이 무대를 가른다. 비가 내린다. 도법, 바르르 떨리는 사지를 가까스로 진정시킨다. 정지상태의 망령에게 환상적인 조명을 밝혀 지면 망령, 허공을 가리키는 엉거주춤한 모습의 신비스런 불상으로 화(化) 하게 된다)

탄성 : 도법당! 도법당!! (만들어진 불상 보고 경악)

(도법, 알듯 모를 듯한 희열을 안고 이윽고 무대에서 사라진다)

-막(幕)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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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생긴 팝콘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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