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자퇴 후 명씨는 서울 수유동의 조그만 전자회사에서 전화선 납땜하는 일을 했다. 주6일 일하고 한 달에 50만원을 받았다. 거리에서 고등학생들이 장난 치는 모습을 보면 아련한 향수가 밀려왔다. '검정고시에 도전할까' 생각했지만 책만 사놓고 포기했다.
친구들이 군대 간다며 술집에서 눈물을 보일 때 명씨는 그들을 은근히 부러워했다.
"솔직히 '나는 중학교 중퇴라 군대도 못 가는데…' 싶어 부끄러웠어요."
그는 2000년 노량진의 한 얼음공장에 취직했다. 매일 새벽 2~6시 얼음 분쇄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얼음조각을 냉동탑차에 실어 노량진 수산시장에 배달하고 한 달에 100만원 남짓 벌었다. 명씨는 "여름에 목장갑을 끼고 오리털 잠바를 입어도 이가 딱딱 부딪쳤다"고 했다.
- ▲ 함께 졸업하는‘같은 반’동생들은 그를 하늘 높이 헹가래 쳤다. 6일 서울 신일고등학교에서 열린 졸업식은 36세 명정노씨에겐 행복했던 고교시절의 마지막이자 새로운 세상을 향한 시작이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그는 뚜렷한 꿈 없이 그날 그날을 살며 서른을 넘겼다. 인생의 전기는 만 31세 되던 2004년에 찾아왔다. 비 오는 새벽, 신문배달 하려고 오토바이를 몰고 가다 전철역 공사장에 놓인 가스통을 들이받았다. 명씨는 "'이제 끝이구나' 싶었다"며 "효도도 못하고 공부도 못하고 장가도 못 가고 살아온 인생이 필름처럼 지나갔다"고 했다.
치아 일곱 대가 부러지고 턱뼈가 깨진 명씨는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지하철역에 붙은 공고를 보고 신동신중학교에 찾아갔다. 50~70대 만학도들이 많이 다니는 평생교육학교다. 아버지는 "늦은 나이에 웬 공부냐"고 했다. 명씨는 "더 늦기 전에 도전하고 싶다"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15여년 만에 다시 하는 공부는 쉽지 않았다. 명씨는 "일할 때는 하루에 서너 시간만 자도 안 피곤했는데 공부는 1시간만 해도 졸음이 밀려오고, 나중엔 아예 책이 벽돌로 보였다"고 했다. 명씨는 신동신중학교에서 3학년 2학기 과정을 마친 뒤 독학으로 서울 성북교육청에서 실시하는 '고입 비교평가 시험'을 통과하고 2006년 3월 신일고에 입학했다. 학교 앞 교복집에서 교복을 산 날, 그는 밤새 아이처럼 들떠 잠을 설쳤다. 고등학교 재학 중 명씨는 서울 쌍문동 한일병원에서 전기보조기사로 일해 학비를 벌었다. 매일 오후 6시30분 한일병원에 출근해서 이튿날 새벽 6시까지 야간 당직을 섰다. 이어 아침 7시30분까지 신일고에 등교해서 오후 4시까지 수업을 받았다.
병원 일은 자정 무렵 한가해졌다. 다른 직원들이 숙직실에서 TV를 보는 동안, 명씨는 구석에서 '수학의 정석'을 풀었다. 그는 매일 밤 "오늘은 다음 장(章)으로 넘어간다"고 별렀다. 그러나 매번 몇 쪽 못 풀고 침을 흘리며 졸았다. 명씨는 "맨 앞에 나오는 '집합'만 3~4번 풀었다"며 "삼각함수와 미적분은 지금도 백지상태"라고 했다.
명씨는 3년 내내 맨 앞줄에 앉았다. 고2 담임교사 오광환(46)씨는 "수업 시간에 단 한 번도 졸지 않을 뿐만 아니라, 쉬는 시간에도 영어·수학 참고서를 봤다"고 했다. 명씨는 3년 내내 같은 반 35명 중에 32등을 유지했다. 중학교 시절의 설움을 씻으려는 듯, 명씨는 뒤늦게 찾아온 학창시절을 맘껏 즐겼다. 명씨보다 나이 어린 가정교사 안성원(여·33)씨는 수업 시간에 장난 삼아 "정노 오빠, 일어나서 책 읽어보세요" 했다. 명씨는 같은 반 아이들이 박장대소하는 가운데 새빨간 얼굴로 책을 읽었다. 고1 때 제주도로 수학여행 갔을 때는 "정노형! 정노형!" 하는 연호에 맞춰 '막춤'으로 무대를 평정했다.
명씨의 목표는 대학 진학이었다. 수험 스트레스와 피로가 겹쳐 입이 한쪽으로 돌아갈 만큼 애를 쓴 끝에 명씨는 지난해 10월 수시 전형으로 충남 홍성의 청운대학교 베트남어 학과에 합격했다. 명씨가 힘들어할 때마다 "이왕 버티는 거 조금만 더 버티자"고 격려한 고3 담임 박혁문(47)씨가 자기 일처럼 좋아했다.
명씨의 장래 희망은 대학 졸업 후
베트남에 가서 한국어 통역으로 일하는 것, 그리고 남들 다 할 때 혼자 못해본 연애를 제대로 한번 해보는 것이다. 4년간 대학 등록금과 하숙비를 어떻게 해결할지 묻자 명씨는 벙긋 웃었다. "빨리 아르바이트 구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