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당선 연설문

221년 전, 길 건너에 아직도 서 있는 회당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민주주의에서 있을 수 없을법했던(improbable) 미국의 실험을, 이 간단한 단어들로 시작했습니다. 독재와 박해를 피하여 바다를 건너온 농부들, 학자들, 정치가들, 그리고 애국자들이 1787년 봄 내내 계속된 필라델피아 대회(Convention) 에서 드디어 독립 선언을 이뤄냈습니다.
그들이 만든 그 문서는 결국엔 서명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종결되진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 나라의 원죄인 노예제도에 의해 더렵혀졌습니다. 그 문제는 식민지들을 분열시켰고, 대회를 교착시켰습니다. 주최자들이 적어도 20년 더 노예무역을 계속할 것을 허가하고, 최종 해결책을 미래세대에 맡길 때 까지 말입니다.
물론 노예문제에 대한 해답은 이미 우리의 헌법에 새겨져 있습니다. 바로 그 핵심에 ‘법 아래 평등한 시민권’이란 이상을 담은 헌법, 그 사람들에게 시간이 흐르며 완벽해질 수 있고, 또 완벽해져야 하는 자유와 정의와 그리고 연합을 약속한 헌법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피지 위의 단어들은 노예들을 구속에서 해방시키기에는, 또는 모든 피부색과 신조를 지닌 남성과 여성들에게 미국 시민으로서의 온전한 권리와 의무를 제공하기에는 충분치 않은 터였습니다. 필요했던 것은 우리의 이상에 대한 ‘약속’과 각자의 시대의 ‘현실’간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거리에서, 그리고 법정에서 항거와 투쟁으로, 내전(남북전쟁)과 시민불복종으로, 항상 극도의 위험에 처해서도 세대를 이어 그들의 몫을 기꺼이 하려 했던 미국인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이 선거운동을 시작할 때 내세웠던 과업들 중 하나입니다. 우리 이전에 일어난 오랜 행진을 계속하는 것, 더욱 정의롭고, 더욱 평등하며, 더욱 자유롭고, 더욱 배려하며, 그리고 더욱 번영하는 미국을 위한 행진 말입니다. 저는 역사의 이 순간에 대통령에 출마할 것을 선택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함께’ 풀지 않는다면, 우리 시대의 문제를 풀 수 없다고 제가 강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다른 배경을 갖고 있지만 공동의 희망을 갖고 있으며, 같아 보이지도 않는데다 같은 곳에서 오지도 않았지만 한 방향으로 나아가길 원한다는 것, 즉 우리 아이들과 우리의 손자들을 위한 더 나은 미래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우리의 연합을 완벽하게 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미국 국민의 훌륭함과 관대함에 대한 제 단호한 믿음에서 비롯합니다. 하지만 저 자신의 미국 이야기에서도 비롯합니다.
저는 케냐 출신 흑인 남성과 캔사스 출신 백인 여성의 아들입니다. 저는 2차세계대전에서 패튼 장군의 부대에 복무하여 대공황을 헤쳐 나온(survived) 백인 할아버지와, 그가 해외에 있을 때 포트 레벤워스(요새)의 폭격기 조립공정에서 일하신 백인 할머니의 도움으로 자랐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최고인 학교들 중 몇 곳에 다녔고(하와이 푸나호우 초등학교, 하버드 대학교 법학대학원-로스쿨), 세계 최빈국들중 하나(인도네시아)에서 살았습니다. 저는 흑인여성(미셸 오바마)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노예들과 노예 소유주들의 피를 갖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소중한 두 딸들에게 우리가 넘기는 유산입니다. 저는 세 개의 대륙에 흩어져있는 모든 인종과 모든 색조(피부색)의 형제, 자매, 조카딸, 조카, 아저씨와 사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살아있는 한, 지구상의 어떤 다른 나라에서도 제 이야기가 가능하지조차 않을 것이란 점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역자 註 : 즉 미국이기에 이런 일이 가능하다)
그 배경은 저를 가장 전형적인(conventional) 후보로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유전적 구성에 이 나라가 부분의 합 이상이며, 여럿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진정 하나라는 관념을 새겨넣은 것이 바로 그 배경입니다.
이 선거운동의 첫 해 내내, 대립에 대한 모든 선입견들에 반(反)하여, 우리는 얼마나 미국인들이 이 화합의 메시지에 굶주려 왔는지를 보았습니다. 제 출마를 순전히 인종적 색안경(lens)으로 보려는 유혹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나라에서 가장 백인이 많은 몇몇 주들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습니다. 아직도 (남북전쟁기의) 남부 연방기가 휘날리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우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흑인)과 백인 미국인간에 강한 유대를 형성했습니다.
이는 인종이 선거운동의 쟁점이 아니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선거운동의 여러 연단에서 몇몇 연사들이 저를 ‘너무 흑인적’이라거나, ‘충분히 흑인적이지 않다’고 판단하셨습니다. 우리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주(州) 경선 전주(前週)동안 인종적 긴장이 수면까지 끓어올랐던(bubbled) 것을 보았습니다. 언론은 인종 양극화의 최신증거를 구하기 위해 모든 출구조사를 뛰어 다녔습니다. 흑백의 기준뿐만 아니라 흑색과 갈색(히스패닉)의 기준으로도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거운동에 인종 토론이 특히나 편을 가르는(divisive, 분열적인) 양상을 맞이한 게 단지 지난 몇 주였습니다.
그 (논의의) 범위 중 한 끝에서, 우리는 제 출마가 어느 정도 소수민족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 비 백인 우대정책)의 작용(exercise)이라는 암시를 들었습니다. 즉, 제 출마는 손쉽게 인종적 화합을 얻으려는 순진한 리버럴(liberal, 진보주의자)들의 희망에만 기반 한다는 겁니다. 다른 끝에서 우리는 제 옛 목사인 예레미아 라이트 목사가 인종 격차를 넓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위대함과 훌륭함을 깎아내리는 관점을 표현하기 위해 선동적인 언어를 쓰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백과 흑, 공히 마땅하게(rightly) 화가 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미 명백한 말로 그런 대립을 야기한 라이트 목사의 발언을 비난해 왔습니다. 몇몇에겐 잔소리 같은 의문이 남아있습니다. 그가 종종 미국의 국내, 그리고 국외 정책의 극렬한 비판자란 걸 제가 알고 있었냐고요? 물론입니다. 제가 교회에 앉아있는 동안 논쟁적으로 간주될 수 있는 언급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냐고요? 네. 제가 그의 정치적 견해 다수와 강하게 의견을 달리 했냐고요? 그렇습니다. 여러분 다수가, 여러분의 목사님들, 성직자들, 혹은 랍비들로부터 여러분들이 강하게 동의하지 않을 언급들을 들었으리라 제가 확신하듯 말입니다.
그러나 최근의 대폭발(firestorm)을 일으킨 그 발언은 단순히 논쟁적이 아니었습니다. 그 언급들은 단순히 느껴진 불의에 대항하여 말하려는 종교 지도자의 노력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그것들은 이 나라에 대해 깊이 왜곡된 시각을 표현했습니다. 즉 백인의 인종차별주의는 일상적인 것이며, 우리가 미국에 대해 옳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도, 미국에 대해 잘못된 것들을 고양시키는(elevate) 시각, 중동에서의 대립을 급진 이슬람의 삐뚤어지고 증오에 찬 이데올로기에서 나온다는 것 대신에 이스라엘 같은 충실한 동맹의 행동에 주로 근거한다고 보는 시각 말입니다.
그렇기에 라이트 목사의 발언은 그릇됐을 뿐만 아니라 편을 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합을 원할 때, 편을 가르는 겁니다. 우리가 일단의 엄청난 문제들, 그러니까 두 개의 전쟁, 테러리스트의 위협, 추락하는 경제, 만성적인 의료보험 위기 그리고 아마도 파괴적일 기후변화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모여야 할 때, 인종적으로 비난한(charged) 겁니다. 이 문제들은 흑인도, 백인도, 라틴계도, 아시안계도 아닌 우리 모두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제 배경이나, 제 정치나, 제가 설파해온(professed) 가치나 이상이 여러분께 보여드려졌으니 제 비난의 발언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라 해도 의심하실 바는 없을 겁니다. 뭣보다 왜 제가 라이트 목사와 친분을 맺느냐고 그 분들이 물으시겠죠? 다른 교회에 가는 건 어땠을까요? 그러면 제가 라이트 목사에 대해서 알았던 모든 것들이, 텔레비전과 유튜브에서 끊임없는 반복 속에 방영되고 있는 그 설교들의 일부라면, 혹은 ‘예수 삼위일체 연합교회(이하 트리니티 교회)’가 몇몇 평론자들에 의해 퍼트려지는 풍자들과 부합한다면, 저도 그것과 아주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리란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저도 그분들처럼 라이트 목사를 비난하고, 불쾌해 했을 겁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제가 그 분에 대해 알았던 모든 게 아닙니다. 제가 20년 전에 만났던 그 분은 저를 제 크리스트교 신앙으로 인도하는데 도움을 주셨고, 제게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병자를 돌보고 빈자를 일으켜야 한다는 우리의 의무에 대해 말씀해 주신 분입니다. 그 분은 미국 해병으로 나라에 복무하셨고, 이 나라의 가장 좋은 대학교들과 세미나들에서 공부하고 또 강의하셨으며, 30년 이상 신의 사역을 이 땅에서 행함으로써 지역 사회에 봉사하는 교회를 이끌어 오신 분입니다. 노숙자들에게 잠잘 곳을 제공하고, 빈곤한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주며, 탁아 서비스와 장학금과, 교도소 봉사를 제공하고, 그리고 후천성 면역결핍증(에이즈)으로 고통 받는 분들에게 손을 내밈(reach)으로써 말입니다.
제 첫 번째 책인 [제 아버지로부터의 꿈]에서, 저는 트리니티 교회에서의 제 첫 예배의 경험을 묘사했습니다.
“사람들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치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건 목사의 목소리를 서까래까지 밀어 올리는 강력한 바람이었다. 그리고 그 한마디 ‘희망’에서 나는 다른 뭔가를 들었다 그 십자가의 발치에서, 도시를 가로지른 수천 개의 교회들에서, 나는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 모세와 파라오의 이야기, 사자굴 안의 크리스트교도들, 마른 뼈들이 널린 들판의 에즈라엘 이야기에 모여든 보통 흑인들의 이야기를 상상했다. 그 생존의 이야기, 자유의 이야기, 그리고 희망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가 되었고, 내 이야기가 되었다. 흘려진 피는 우리의 피였고, 그 눈물은 우리의 눈물이 되었다. 이 화창한 날에 이 흑인 교회가 한번 더 미래세대와, 더 넓은 세상에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져가는 배(船)처럼 보일 때까지. 우리의 시련과 승리가 일순 특별하면서도 보편적인 것이 됐다. 흑인의 것이면서도 그 이상의 것이 됐다. 우리의 여정을 기록하며, 그 이야기들과 노래들은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필요가 없던 기억들을 다시 생각할 수단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다. 모든 이들이 배우고 기릴, 그리고 우리가 그것으로 재건할 수 있을 기억 말이다.”
그게 트리니티 교회에서의 제 경험이었습니다. 이 나라 전역의 다른 주요 흑인 교회들처럼 말입니다. 트리니티 교회는 총체적인 흑인 공동체를 구체적으로 나타냅니다. 의사와 복지정책의 수혜로 살아가는 젊은 어머니. 모범적인 학생과 전(前) 비행청소년 단원 말이죠. 다른 흑인 교회들처럼 트리니티 교회의 예배는 시끄러운 웃음과 음란한 우스갯소리로 가득합니다. 춤추고, 손뼉치고, 소리치는데 익숙치 않은 귀에는 불쾌하게 들릴(seem) 수도 있습니다. 그 교회는 친절과 잔인함을, 불같은 지성과 놀라운 무지를, 투쟁과 성공을, 사랑과, 네, 미국에서 흑인들의 경험을 구성하는 씁쓸함과 편견을 전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이것이 라이트 목사와 제 관계를 설명하는 것을 도울 겁니다. 그가 불완전한 사람이기는 하나, 그는 제겐 가족과도 같았습니다. 그는 제 믿음을 강하게 했고, 제 결혼의 주례자였으며, 제 아이들에 영세를 주었습니다. 저는 그와의 대화에서 단 한 번도 다른 인종집단에 대해 경멸적인 용어로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으며, 대화한 백인들과는 공손함과, 존중으로만 대했습니다. 그는 그 안에 모순을, 즉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말인데, 그가 아주 많은 해 동안 열심히 봉사한 지역사회의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저는 흑인 사회를 부정하는 것 이상으로 그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역자 주 : 흑인 사회를 부정하는 것은 곧 그를 부정하는 겁니다.) 저는 저를 키우는데 도움을 주신 여성인 제 할머니를 부정하는 것 이상으로 그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역자 주 : 할머니를 부정하는 것은 곧 그를 부정하는 겁니다.) 저를 위해 거듭 희생하셨고, 세상의 어떤 것이든 사랑하는 만큼 저를 사랑하신 여성이었습니다. 그러나 딱 한번 거리에서, 스쳐지나간 흑인 남성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하고, 한 번 이상, 저를 움츠리게 했던 인종적이고, 민족적 고정관념을 말한 여성이었습니다.
이 분들은 제 일부입니다. 그리고 그 분들은 제가 사랑하는 미국의 일부입니다.
몇몇은 이것을 정말로 용서가 안 될(inexcusable) 발언들을 정당화하거나 변명하기 위한 시도라 볼 겁니다. 저는 그게 아니라고 여러분께 장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정치적으로 이 사건에서 안전하게 몸을 뺄 수를 생각하고, 그냥 이 사건의 여파가 사라지기만을 바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라이트 목사를 괴짜나 선동가라고 무시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제랄딘 페레로’를, 그녀의 최근 발언 직후에, 마음 깊이 자리한 인종적 편견을 숨기고 있다며 해고해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역자 주 : 힐러리 클린턴의 선거운동 재정고문인 제랄딘 페레로는 오바마가 ‘흑인이 아니었다면 지금만큼 지지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발언하여 파장을 일으켰고, 결국 비난 속에 직위에서 물러났음.)
그러나 인종은, 바로 지금 이 나라가 무시할 수 없다고 제가 생각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라이트 목사가 미국을 화나게 한 그의 설교에서 했던 같은 실수를 범할 것입니다. 현실을 왜곡할 만큼 단점을 단순화하고, 고정관념화하며, 부풀리는 것 말입니다.
사실은, 지난 몇 주간 제기된 의견들과 떠오른 쟁점들은 우리가 진정, 절대로 해결치 않았던 이 나라에서의 인종의 복잡함(complexities)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아직 완벽하게 하지 못한 ‘우리 연합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지금 손을 뗀다면(walk away), 우리가 그냥 우리 각자의 편(corner)으로 돌아가 버린다면, 우리는 건강보험이나 교육, 또는 모든 미국인들에게 좋은 직업을 찾아줄 필요같은 난관들을 함께 모여서 해결할 수 없을 겁니다.
이런 현실을 이해하는 것은 어떻게 우리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에 대해 일깨워 줄 무언가(reminder)를 필요로 합니다. 한 때 윌리엄 포크너가 썼듯 “과거는 죽지도, 묻혀 버리지도 않습니다. 사실 그건 과거조차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나라에서의 인종적 불의에 얽힌 역사를 읊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회(흑인 사회)에 존재하는 많은 격차들이 노예제도와 ‘짐 크로(Jim Crow)’ 법(역자 주 : 도망 노예 처분법)의 잔인한 유산 하에서 고통 받았던 앞선 세대로부터 (현대로) 넘겨져 온 불평등들에서 그 근원을 직접 추적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종적으로) 분리된 학교들은 저급한 학교들이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역자 주 : 학교에서 흑백분리는 위헌이라 판결한 사건)”으로부터 5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 그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학교들이 그 때, 그리고 지금 제공한 저급한 교육은 오늘날 흑인학생과 백인학생 간에 만연한 성취도 격차를 설명하는 걸 도와줍니다.
종종 폭력을 수반하여 흑인이 부동산을 소유하는 게 금지되고,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업주에게 대출이 주어지지 아니하며, 흑인 집주인이 연방주택관리청(FHA)의 (저렴한) 주택저당대출을 이용할 수 없고, 흑인들이 노조와, 경찰력과, 소방서에서 제외되는 법제화된 차별은 흑인 가정들이 미래 세대에 물려줄 상당한(meaningful) 부(富)를 모을 수 없었음을 의미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흑인과 백인간의 부와 소득격차를, 그리고 오늘날 시내와 교외 공동체의 너무나 많은 곳에서 지속되는데다, 집중적이기도 한 빈곤 가정들(家計, poverty pockets)을 설명하는 걸 도와줍니다.
흑인들 사이에서 경제적 기회의 부재(不在)와, 자기 가족을 부양할 수 없음에서 비롯한 수치 및 좌절은 흑인 가정들이 침식(erosion)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는 아마도 수년간의 복지정책이 악화시켰을 문제입니다. 그리고 시내의 흑인 이웃들에게 많은 공공사업이 부족한 것, 즉 아이들이 놀 공원, 구역을 순찰하는 경찰관, 정기적인 쓰레기 수거, 그리고 건축 법규 시행자가 없는 이 모든 것은 우리를 계속해서 괴롭히는 폭력과 황폐함, 그리고 무시의 악순환을 만들어냈습니다.
이것이 라이트 목사와 그와 같은 세대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자랐던 현실입니다. 그들은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에 성년이 됐는데, 인종 분리가 나라의 법이었고, 기회는 체계적으로 제한됐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언급할만한 것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차별에 직면하여 실패하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남성들과 여성들이 불평등을 극복했는가, 즉 저처럼 그들을 뒤따를 사람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무에서 유를 창조했는가(make a way out of no way)'입니다.
그러나 ‘아메리칸 드림’의 일부를 얻기 위해 그들의 길을 긁어내고(scratch), 할퀴었던 사람(claw)들에도 불구하고, 해내지 못한 다수가 있었습니다. 차별에 의해 이런 방식 혹은 저런 방식으로 끝내 패배한 사람들입니다. 그 패배의 유산은 미래세대로 건네졌는데, 이들은 젊은 남성들과 더 많은 여성들로, 우리는 그들이 길 모퉁이에 서 있거나, 우리의 감옥에서 쇠약해져가는 걸 봅니다. 미래 전망에 대한 희망 없이 말입니다.
심지어 (꿈을) 이루어낸 흑인들에게도, 인종문제와 인종차별주의는 그들의 세계관을 근본적인 방식으로 계속해서 규정합니다. 라이트 목사 세대의 남녀들에겐 모욕과 의심과 두려움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들 시대의 ‘분노(anger, 화)’와 씁쓸함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분노는 공공장소에서, 동료들 앞에서, 혹은 백인 친구들 앞에서 표현 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발소나 주방 식탁에서 그 목소리를 찾을 겁니다. 종종 그 분노는 정치인들이 인종경계를 따라 투표를 선동하기 위해, 또는 정치인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이용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종종, 그 분노는 일요일 아침 교회에서, 설교단과 좌석들에서 그 목소리를 찾습니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라이트 목사의 설교 중 몇몇에서 그러한 화를 듣고 놀란 그 사실은 우리에게 ‘미국식 삶에서 가장 인종적으로 분리된 시간은 일요일 아침’이라는 진부한 문구를 상기시킬 뿐입니다.(역자 주 : 백인은 백인교회만, 흑인은 흑인교회만 가며, 설교 내용도, 교회 공동체의 삶도 인종에 따라 극도로 나뉘어 있음을 의미함.) 그런 분노는 항상 생산적이지는 않습니다. 실로 그것은 너무나 자주 진정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키며, 우리가 우리 상황 하에서 우리 자신의 복잡함(문제)들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게 하며, 아프리카계 미국인 공동체가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필요한 연합을 형성하는 것을 막습니다. 그러나 그 분노는 실재(實在)합니다. 그것은 강력합니다. 그리고 단지 그것이 사라지길 바라는 것, 그 뿌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걸 비난하는 것은 단지 인종간에 존재하는 오해의 균열을 넓히는데 일조할 뿐입니다.
사실 비슷한 분노가 백인 공동체의 일부분 안에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근로 중산층 백인 미국인들은 그들이 인종에 의해 특별히 특권을 받아왔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들의 경험은 ‘이민 온 사람들’의 경험입니다. 그들에 관한 한, 누구도 그들에게 아무것도 건네주지 않았고, 그들은 (아무것도 없는) 처음부터 그 (모든)걸 이룩해 왔습니다. 그들은 평생 열심히 일했지만, 여러 번 그들의 일자리가 해외로 옮겨가고, 평생 노동 후에 연금이 사라지는(dumped) 걸 볼 뿐입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해 불안해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꿈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오르지 않는 임금과 세계적 경쟁 속에서 기회는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으로 보이게 됩니다. 당신의 꿈이 제 손실로 이뤄지는 것 말이죠. 그래서 도시 건너편의 학교로 아이들을 버스에 태워 보낼 때, 전혀 자기가 저지르지 않은 불의(不義) 때문에 (즉, 자기의 조상들이 노예제도로 저지른 잘못 때문에)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좋은 직업이나 대학교에서 좋은 자리에 가는 것에 유리함을 얻는다는 걸 들을 때, 도시 내 이웃들에서의 범죄에 대한 두려움이 다소 편견에 찬 것이란 소리를 들을 때, 그들에겐 시간이 갈수록 '울분(resentment)'이 쌓입니다.
흑인 공동체 안에서의 분노처럼, 이런 울분들은 점잖은 집단 안에서 항상 표현된 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울분은 적어도 한 세대 동안 정치적 지형을 형성하는데 일조했습니다. 복지와 소수민족 우대정책에 대한 ‘분노’가 ‘레이건 연합’을 만드는데 일조했습니다. 정치인들은 으레 그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범죄에 대한 공포를 이용했습니다. 토크쇼 진행자와 보수 논객들은 그들의 전체적인 경력을 인종차별주의의 그릇된 요구를 드러내면서 쌓아왔습니다. 반면 인종적 불의와 불평등에 대한 정당한 토론은 단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으로만 올바를 뿐이라는 비꼬는 말)’ 혹은 ‘역 인종차별주의(reverse racism)'이라며 무시했습니다.
흑인의 분노가 종종 역(逆)생산적(counterproductive)인 것처럼, 이러한 백인들의 울분도 중산층이 처한 곤경(middle class squeeze)의 진짜 범인으로부터 주의를 분산시켜 왔습니다. 즉 내부자 거래가 만연한 조합주의문화, 의문을 제기할만한 회계 관행, 그리고 한탕주의(short-term greed) 말이죠. 다시 말해 로비스트와 특수 이익이 지배하는 워싱턴, 다수보다 소수에 우호적인 경제정책들 말입니다. 그러나 정당한 우려에 대한 인정 없이, 백인 미국인들의 울분이 사라지길 바라고, 그들을 잘못 인도되었다거나,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인종적 분리를 더욱 넓히고, (상호) 이해로의 길을 막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로 지금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오랜 시간동안 꼼짝 못하고 갇혀있던 인종적 교착상태입니다. 저에 대한 몇몇 흑인, 그리고 백인 비판자들의 주장과 달리, 저는 한 번의 선거 주기(cycle)로, 혹은 한 명의 후보, 특히나 저 같은 불완전한 후보로 우리의 인종 분열을 우리가 넘어설 수 있으리라 생각할 만큼 순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확고한 확신을 주장해왔습니다. 신과, 미국 국민들에 대한 제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 확신은, 함께 하면 우리는 오랜 인종차별의 상처들 중 몇몇을 넘어설 수 있으며, 우리가 ‘더욱 완벽한 연합’의 길을 계속하려면, 사실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겁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공동사회엔, 그 길은 우리의 과거의 피해자가 되지 아니하고, 우리의 과거의 짐을 끌어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모든 미국인들의 삶의 일면에서 정의(正義)의 전적인 조처(full measure)를 계속해서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의 특별한 불만, 즉 더 나은 건강보험, 더 나은 학교, 그리고 더 나은 직장에 대한 불만을 모든 미국인들의 더 큰 열망에 묶어내는 겁니다. 유리 천장을 깨려 노력하는 백인여성(역자 註 : 아무리 능력 있는 여성도 직장 내에서는 보이지 않는 성차별에 의해 어느 정도 이상 승진할 수 없음을 의미), 실직한 백인남성, 가족을 먹여 살리려는 이민자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각자의 삶에 전적인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아버지들에게 더 많은 것(역할)을 요구하고, 우리의 아이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쓰며, 책을 읽어주고, 그들이 자기 삶에서 난관과 차별을 맞이할 수 있겠지만, 절대 절망이나 냉소주의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야 합니다. 즉 그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음을 항상 믿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얄궂게도, 전형적으로 미국적이라 할 수 있는, 예 그렇습니다, 보수주의적인 자조(自助, self help)에 대한 생각은 라이트 목사의 설교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에서 발견됩니다. 그러나 제 전(前) 목사가 종종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자조의 프로그램에 착수하는 것은 사회가 변할 수 있다는 믿음도 요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라이트 목사의 설교의 큰 잘못은 그가 우리 사회의 인종주의에 대해 말했다는 게 아닙니다. 그의 잘못은 그가 마치 우리 사회가 정적(靜的, 유동적이지 아니함)인 것처럼, 마치 아무런 진보가 없었던 것처럼, 마치 이 나라가, 즉 그의 신도들 중 하나가 가장 높은 지위에 출마하여 흑백, 라틴, 아시안, 부자와 빈자, 젊은이와 노인간의 연대를 만들려는 것을 가능케 한 이 나라가 아직도 돌이킬 수 없을 만치 비극적 과거에 매여 있다는 것처럼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그리고 우리가 보아온 것은 미국이 변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이 나라의 진정으로 훌륭한 점입니다. 우리가 이미 성취한 것이 우리에게, 우리가 앞으로 취할 수 있고, 또 취해야 하는 것을 위한 희망을, 희망의 담대함을 줍니다.
백인 사회에서 더욱 완벽한 연합으로의 길이 의미하는 바는 흑인 사회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 흑인의 마음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 옛 차별의 유산들은 물론이고, 과거보다는 덜 공공연하긴 해도 차별 사례들이 요즘에도 실재하며 본격적으로 그 해결에 나서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말뿐이 아니라 행동으로, 우리의 학교와 공동체에 투자하고, 우리의 시민 권리를 행사하며, 우리의 범죄사법(司法) 체제에 공정성을 보장함으로써, 지난 세대들이 사용할 수 없었던 기회의 사다리를 이 세대에 제공함으로써 말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꿈이 제 꿈의 손실로 이뤄지지 않아도 된다고 이해하는 걸 모든 미국인들에게 요구합니다. 즉 흑인과, 라틴사람과, 백인 아이들의 건강과 복지와 교육에 투자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모든 미국이 발전하는 것을 도우리란 제 꿈을 손상시키지 않고서도 말입니다.
결국 요구되는 것은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이 요구하는 바, 그 이상도 그 이하도(nothing more and nothing less) 아닙니다. 즉 남이 우리에게 하기를 바라는 대로 우리가 그들에게 행하라는 겁니다. “우리 형제의 보호자가 되게 하소서”라고 성경구절이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다른 이들 안에 우리 모두가 갖고 있을 공동의 몫을 찾읍시다. 그리고 우리의 정치가 그 정신도 본받도록 합시다.
우리가 이 나라에서 선택권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분열을, 대립을, 그리고 냉소주의를 낳는 정체(政體, 정치체제)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종을, 우리가 OJ 심슨 재판에서 그랬듯 단지 구경거리로서, 카트리나 태풍 피해 직후 우리가 그랬듯 비극의 시작으로, 혹은 매일 밤 뉴스의 소재로 대할(tackle) 수 있습니다. 우리는 라이트 목사의 설교들을 모든 채널에서 매일 방영할 수 있고, 지금부터 선거까지 계속 그것들에 대해 얘기할 수 있으며, 제가 어느 정도나 그의 공격적인 말들을 믿거나 그에 공감한다고 미국인들이 생각할지, 혹은 아닐지 라는 하나의 질문만을 이 선거동안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힐러리 지지자에 의한 정치적 실수를, 그녀가 후보경선에 장난을 치고 있다(playing race card)는 증거로 한 방 먹일 수 있으며(pounce), 혹은 백인 남성들이 본선에선 정책은 고려치 않고, 모두 존 매케인에게로 가버릴지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입니다(We can do that).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하면 다음번 선거에선 우리는 또 다른 여러 분열들에 대해 말하게 되리라고 여러분께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번에도, 그리고 다음 번에도, 그리고 아무 것도 변치 않을 것입니다.
(물론) 이건 하나의 선택지(option)입니다. 아니면 이번에, 이번 선거에서 우리는 모여서 말할 수 있습니다. “이번엔 안 돼(Not this time).” 이번에 우리는 붕괴하는 학교들, 그러니까 흑인 아이들과 백인 아이들, 그리고 아시아 아이들과 히스패닉 아이들과 미국 원주민(인디언) 아이들의 미래를 앗아가는 학교들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이번에 우리는 ‘이 아이들(these children)’은 배울 수 없다고, 우리처럼 보이지 않는 ‘저 아이들(those children)’은 다른 누군가의 문제라고 우리에게 말하는 냉소주의를 거부하고 싶습니다. 미국의 아이들은 ‘저 아이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의 아이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애들을 21세기 경제에 뒤처지게 내버려두지 않을 겁니다. 이번에는 (내버려둬서는) 안 됩니다.
이번에 우리는 의료보험도 없고, 워싱턴에서의 특수 이익집단들을 극복할 힘이 없는, 하지만 우리가 함께 하면 그들에 맞설 수 있는 백인들, 흑인들, 그리고 히스패닉들로 병원 응급실의 대기 줄이 얼마나 가득한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이번에 우리는 한 때 모든 인종의 남녀에게 훌륭한 삶을 제공했던 문 닫은 제철소들, 그리고 한 때 모든 종교와 모든 지역과, 모든 직업의 미국인들이 소유했던 ‘팔려고 내놓은 집들(house for sale,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속절없이 쏟아져 나온 주택매물들)’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이번에 우리는 누군가 당신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이 당신의 일자리를 가져갈 수 있다는 게 진짜 문제가 아니란 사실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단지 이윤을 위해 일자리를 해외로 보내버린 건 바로 당신이 일하는 회사입니다.
이번에 우리는 다양한 피부색과 다양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같은 자랑스러운 깃발 아래, 함께 복무하고, 함께 싸우며, 함께 피흘리는 남성들과 여성들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승인돼서는 안됐고, 해서도 안됐던 전쟁으로부터 그들을 어떻게 데려올 지를 우리는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들과 그들의 가족을 돌봄으로써, 그리고 그들이 얻은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우리의 애국심을 보일 수 있을지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제가 이것이 미국인 대다수(vast majority)가 이 나라에 원하는 것이라고 진정으로 믿지 않았다면, 저는 대통령직에 출마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 연합은 절대 완전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대를 거듭하며, 이 연합은 항상 완벽해질 수 있음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제가 이 가능성에 대해 의심하거나, 냉소적으로 느끼는 저를 발견할 때마다, 제게 가장 큰 희망을 주는 것은 (바로 우리) 다음 세대(next generation)입니다. 변화에 대한 태도와, 믿음과, 그리고 열린 마음의 젊은이들이 이번 선거에서 이미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오늘 특별히 제가 여러분께 남겨드릴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제가 킹 목사의 생일에 연설할 매우 큰 영예를 그의 고향 교회인 애틀란타의 에베네저 침례교회에서 얻었을 때 들은 얘기입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에서 우리 선거운동을 위해 조직을 꾸린(organized) ‘애쉴리 바이아’라는 스물 세 살난 젊은 백인 여성이 있습니다. 그녀는 이 선거운동이 시작된 이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대부분인 공동체를 조직화하기 위해 일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는 거리 지원유세를 하던(walked around) 모두가 자기의 이야기를 하는, 그리고 그들이 왜 거기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원탁토론에 자리했습니다.
그리고 애쉴리는 그녀가 아홉 살이었을 때 그녀의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며칠간 일을 못하여 해고당했고, 건강보험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파산신청을 해야 했으며(file bankruptcy), 그 때 애쉴리는 그녀의 어머니를 돕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고 결심했답니다.
음식이 가장 큰 지출들 중 하나라는 걸 알았기에, 애쉴리는 그녀가 무엇보다도 진짜 좋아하고 진짜 먹길 원하는 게 ‘겨자 야채 샌드위치라고’ 그녀의 어머니가 확신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가장 싸게 먹는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어머니가 나아질 때 까지 일 년 동안 이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원탁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 그녀가 우리 선거운동에 합류한 것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부모님을 돕길 원하는, 그리고 도와야 하는 이 나라 수백만의 다른 어린이들을 도울 수 있기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애쉴리는 다른 선택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누군가가 그녀에게 그녀 어머니의 문제가 복지제도에 기대는데다 일하기엔 너무나 게으른 흑인들 때문이라는, 혹은 불법적으로 이 땅에 온 히스패닉 때문이라는 방식으로 얘기해 주었겠죠. 그러나 그녀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불의에 맞선 그녀의 싸움에서 함께 할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어쨌든 애쉴리는 그녀의 이야기를 마치고는 방을 돌아다녔고, 모두에게 왜 그들이 이 선거운동을 지지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른 이야기와 이유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특정한 쟁점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전체시간 내내 조용히 앉아있던 흑인 노인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애쉴리는 왜 그가 거기에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는 어떤 특정한 문제를 내놓지 않습니다. 그는 건강보험이나 경제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교육이나 전쟁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버락 오바마를 위해 거기 있노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방의 모든 사람들에게 간단히 말했습니다. “나는 애쉴리 때문에 여기에 왔습니다.”(I'm here because of Ashley)
“나는 애쉴리 때문에 여기에 왔습니다.” 그것만으론, 그 젊은 백인 여성과 나이든 흑인 남성간의, 일순간의 ‘인정(recognition)'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그것은 병자에게 건강보험을 제공하기에도, 실직자에게 일자리를 주기에도, 우리 아이들에게 교육을 제공하기에도 충분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게 우리가 시작하는 곳입니다. 우리의 연합이 강해지는 곳입니다. 그리고 한 무리의 애국자들이 필라델피아에서 그 문서(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이래 2백하고도 21년의 우리의 노정(路程)에 수많은 세대가 깨닫게 되었기에(come to realized), 그곳은 ‘완벽함’이 시작되는 곳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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